오피니언 사내칼럼

[더블 클릭] 건배사


여럿이 모이는 술자리라면 대통령도 피해 갈 수 없는 게 있다. 바로 건배사다. 오늘을 축원하고 내일의 소망과 꿈을 함축적으로 담아 나오는 한마디에 좌중은 하나가 되고 취흥과 풍미는 더욱 높아진다. 얼렁뚱땅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남들과 같아서도 안 되고 분위기도 맞춰야 한다. 그러다 보니 말 재주나 임기응변이 모자란 이들에겐 이만저만한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다. 10초의 승부 또는 예술이라는 표현이 나온 것도 당연하다.


△건배사가 예전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옛날 선조들은 서로 잔을 주고받으며 정감을 나누기 위해 권주가를 택했다. "한잔 먹세 그려/또 한잔 먹세 그려/꽃 꺾어 셈하고/무진무진 먹세 그려"로 시작되는 송강 정철의 '장진주사'를 듣다 보면 어찌 저런 풍류가락이 멋들어지게 나오는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현대 들어 일본식 군국주의 문화와 서양 문물이 우리 음주 문화와 섞이면서 변질되기 시작, 지금은 잔을 들고 선창과 후창을 잇는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관련기사



△건배사는 시대상을 반영한다. 군사정권 시절에 '건배' 또는 '위하여'와 같은 딱딱한 게 주류를 이뤘지만 민간 정부가 들어선 후 자유로운 표현법이 선보였다. 우울한 건배사도 있었다. 국민들이 고통의 눈물을 흘렸던 외환위기의 와중에 강남의 룸살롱에서는 고금리 혜택을 톡톡히 받았던 고액자산가들의 '이대로' 외침이 울려 퍼졌다. 요즘 들어 '사이다(사랑합니다 이 생명 다 할 때까지)'나 '당신멋져(당당하고 신나고 멋있게 져주며 살자)' '파란만장(1만원권이 만장, 부자 되라는 뜻)'과 같은 세련되고 애교 섞인 건배사가 등장하고 있으니 세상 많이 변했다.

△최근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과 새누리당 원내대표단과의 만찬 자리에서 '우하하(우리는 하늘 아래 하나다)'라는 건배사가 나왔다고 한다. 아마도 서로 힘을 합쳐 최근의 혼란스러운 정국을 해결하자는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하지만 비서실장이 여당의 중진의원들을 초청해 국정 현안을 논의했다는 것도 이상하고 '우하하'라는 건배사도 어딘가 불편하다. 지난 1992년 '초원복집' 사건 때 본인이 외쳤다던 '우리가 남이가'가 자꾸 떠오른다면 지나친 과잉반응이려나….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