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 부검(Psychological Autopsy)은 자살자의 유서나 주변인들과의 인터뷰 등 모든 자료를 통해 '왜 그 사람이 자살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규명하는 작업으로, 법원에서 심리적 부검이 이뤄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고법 행정9부(박형남 부장판사)는 김모씨의 유족들이 공무원연금공단을 상대로 "망인의 자살이 업무상 재해임을 인정해달라"고 낸 소송에서 원심을 깨고 "업무와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가 있다"고 승소 판결했다고 22일 밝혔다.
한 지방국세청에서 계장으로 일하던 김씨는 많은 업무량에 시달리면서도 타고난 책임감으로 성실히 업무에 응했다.
그러나 2009년 특별승진 대상자에서 제외된 김씨는 우울증이 발병했고 이후로도 계속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그 해 11월 자택 아파트 22층에서 뛰어내려 숨졌다.
망인은 유서에서 "내가 죽는 이유는 사무실의 업무 과다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임을 확실히 밝혀 둔다"고 적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망인은 우울증 상태에서 자살을 택한 것으로 보이며 우울증의 근본 원인은 개인의 기질적 취약성 탓"이라고 분석한 감정인의 의견을 받아들여 원고 청구를 기각했다.
반면 항소심 재판부는 1심의 감정이 충분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심리적 부검을 실시하기로 했다.
법원은 1,000건 이상의 자살 사례 연구경험이 있는 민성호 연세대학교 원주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를 감정인으로 지정했고, 민 교수는 자료 조사는 물론 망인의 가족과 직장 동료 등에 대해 10시간 이상의 개별 면담을 실시했다. 그 결과 "불합리한 조직개편과 승진 좌절로 인한 실망감 등이 망인에 '내 삶은 가치가 없다'는 자기애 손상을 줬고, 이로부터 우울증이 발병, 자살을 택했다고 볼 수 있다"는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 재판부는 "많은 이들이 업무상 스트레스로 자살을 택하고 있지만 진료기록 등만을 보는 법원의 감정촉탁은 자살자가 죽음을 택한 진짜 원인을 규명하는데 충분치 않았다"며 "이미 미국 법원 등에서도 증거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심리적 부검을 '자살원인규명절차'로 변경하는 것을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