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털터리였지만 큰 기대와 꿈을 품고 미국에 왔습니다."
21세의 나이에 조국인 오스트리아를 떠나 미국에 첫 발을 디딜 당시 가진 것이라곤 단돈 20달러와 근육질로 뭉쳐진 우람한 몸 밖에 없었던 아놀드 슈워제네거(56)가 마침내 자신의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었다.
슈워제네거에게 미국은 `성공의 땅`이었다. 보디빌딩에서부터 영화, 사업, 그리고 정치에 이르기까지 그의 도전은 매번 알찬 수확으로 연결됐다.
슈워제네거는 1947년 오스트리아의 촌락 그라즈에서 경찰서장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 구스타프 슈워제네거는 1938년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자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에 가입한 인물.
아버지를 통해 태생적으로 나치와 연결된 슈워제네거는 15세부터 역도를 시작, 20세에 `미스터 유니버스`로 등극했다. 그는 `미스터 유니버스` 외에 `미스터 올림피아` `미스터 월드` 등 세계 타이틀을 13차례 차지하는 등 60년대와 70년대에 세계 최고의 보디빌더로 군림했다.
1968년 미국으로 이민온 슈워제네거는 보디빌딩으로 다듬어진 우람한 몸매 덕분에 1970년 `뉴욕의 헤라클레스`라는 영화의 단역을 맡아 할리웃에 처음 데뷔했다.
그러나 그가 일반의 주목을 끌기 시작한 것은 `미스터 올림피아` 대회를 다룬 1977년도 다큐멘터리 `펌핑 아이언`(Pumping Iron)이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으면서부터였다.
슈워제네거는 이어 1982년 `야만인 코난`(Conan the Barbarian)으로 박스 오피스 흥행에 성공, 배우로서 입신했고 이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SF영화 `터미네이터`(The Terminator)에서 검은 가죽잠바에 선글라스를 쓰고 등장,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때부터 그는 가죽잠바와 선글라스로 대변되는 터프한 이미지를 앞세워 세계적인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한 때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벽돌 쌓는 노동자로 일하기도 한 슈워제네거는 1980년 위스콘신 대학에서 경영 및 국제경제학 학사학위를 취득하는 등 사업에도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부동산업에 뛰어들어 브루스 윌리스, 실베스터 스탤론 등 다른 배우들과 동업으로 식당체인 `플래닛 할리웃`(Planet Hollywood)을 창업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와 인기만으로 만족하기엔 그가 지닌 야망이 너무 컸다. 그의 시선은 늘 정치계를 맴돌았다. 기회는 곧 그를 찾아왔다. 1979년 특별 올림픽의 국제 역도 훈련코치를 역임한 그에게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은 체육위원회 위원장직을 안겨주었다. 1980년의 일이었다.
일단 교두보를 마련한 슈워제네거는 1995년 전국 도심경기재단(NICGF)을 설립했다. LA에서 저소득층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여름 스포츠대회를 주관하기 위해 시작된 이 재단은 현재 15개 도시의 400개 학교에서 25만명의 어린이들이 참여하는 교육 및 스포츠 프로그램으로 성장했다.
슈워제네거는 특히 지난해 애프터스쿨 프로그램을 장려하는 주민발의안 49의 입안자이자 후원자로 캠페인에 나서 발의안을 통과시키는데 성공하면서 캘리포니아 유권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1986년 존 F. 케네디 전대통령 여동생의 딸인 마리아 슈라이버와 결혼한 것도 그의 정치활동에 큰 도움이 됐다. 그는 TV기자인 아내와 17년째 결혼생활을 하면서 캐서린, 크리스티나, 패트릭, 크리스토퍼 등 4자녀를 두고 있다.
<우정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