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로터리] 사람을 위한 도시


경복궁 동쪽에서 창덕궁 서쪽에 이르는 길을 '북촌길'이라고 부른다. 정독도서관, 가회동 31번지를 포함한 북촌한옥마을, 재동초등학교, 중앙고등학교로 올라가는 계동길 등으로 이어지는 문화의 길이자 역사의 길이다.


십여 년 전 그 길을 역사문화탐방로로 정비하기 위한 설계경기가 있었다. 우리는 평지가 아니라 야트막한 4개의 언덕을 오르내리는 길의 특성을 살린 '이야기 고갯길'을 만들자는 계획을 제안해 당선됐다. 약 850m 내외의 그리 길지 않은 길이지만, 고개를 넘을 때마다 조금씩 다른 풍경으로 이어지는 길을 천천히 거닐며 역사와 삶의 흔적을 느끼게 하자는 의도였다. 당시 북촌길은 인도도 가로수도 가로등도 없는 2차선 차로에 불과했다. 재동초등학교 인근에만 인도가 있었다. 산책과 여행을 이끄는 탐방로가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장치를 고려해야 했다. 일단 한정된 폭의 도로에 인도를 만들기 위해 차로의 폭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차로가 좁아지면 차량이 속도를 높이지 못해 보행자의 안전도 어느 정도 확보되리라 생각했다. 평균 3.5m인 차로 폭을 최소 기준인 2.9m로 하고 도로 양쪽에 각각 1.5m 이상의 인도를 확보했다. 인도가 넓어지는 구간에는 가로수와 가로등과 벤치를 넉넉하게 배치했다. 가로수들 사이에는 우리나라 자생초 위주의 화단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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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갯길의 가장 높은 지점에는 차로 한가운데에도 느티나무를 심어 차와 사람이 함께 시원한 그늘을 넘나들도록 했다. 사람과 역사와 자연이 함께 걷는 길을 만들기 위해 조경·건축·교통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자문을 거쳐 실시설계가 완성됐다.

그런데 막바지에 주민공청회와 시청과 담당 구청, 심지어 경찰청 등에 재확인을 거치며 난관에 부딪혔다. 길가 상점주들이 가로수 때문에 간판을 가리면 안 되니 피해서 심거나 없애야 한다고 민원을 넣었다. 자생초 화단은 사람들이 함부로 담배꽁초를 버릴 것이니 관리가 안되면 책임 주체가 불분명하다며 반대했다. 고갯길과 길모퉁이의 가로수 식재 계획은 술 취한 운전자가 자칫 들이받을 위험이 있으니 빼버리자는 공무원의 의견이 가장 압권이었다. 원칙적으로 불법인 음주운전까지 배려하는, 차를 위해 사람의 권리를 제한하자는 상식도 원칙도 없는 논리에 어안이 벙벙했다. 마지막으로 2.9m 차로는 선례가 없으니 다시 3.5m 폭으로 계획하라는 바람에, 가로수와 자생초 화단 계획은 20% 정도만 남았다.

그런데 얼마 후 버스 중앙차로제가 생기며 차로의 최소 폭은 2.75m까지 가능해졌다. 우리의 제안이 불가능한 일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가 살고 싶은 도시는 차를 위한 도시가 아니라 사람을 위한 도시다. 사용자인 시민의 권리보다 서비스의 주체인 공무원·공공기관의 편의와 관리의 효율성을 먼저 따지는 행태는 지난 십 년간 별반 개선된 것 같지 않다. 최근 잇달아 터지는 사고에 대처하는 국가기관들의 허둥대는 모습을 보니 더욱 그렇다. 책임과 도전을 회피하고 자리 지키기에 급급하다 보면, 발전은커녕 퇴보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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