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7월16일] 새뮤얼 인설


‘어둠을 밝힌 창조적 사업가’와 ‘사기꾼’. 새뮤얼 인설(Samuel Insull)에 상반된 평가다. 그럴 만 하다. 맨손으로 거대 전력회사를 일구었으나 수많은 투자자들에게 손해를 안겨줬으니까. 1859년 런던에서 가난한 목사의 8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난 인설은 가게 점원에서 행상까지 닥치는 대로 일하며 자랐다. 인생의 전환점은 발명가 에디슨과 만남. 바다를 건너온 21세 청년 인설을 보자 마자 에디슨은 비서 겸 경리담당에 앉혔다. 9년 후 에디슨전기회사(GE의 전신)의 부사장까지 오른 인설은 33살 때 독립, 뉴욕을 떠나 시카고에 자기 회사를 차렸다. 시카고의 당시 인구 100만명 중 전기를 쓰는 사람은 불과 5,000명. 사용료가 비쌌기 때문이다. 인설은 발전소 대형화와 주야간 요금 차등제, 계량기 보급으로 수요층을 넓혀 나갔다. 냉장고와 라디오 붐이라는 운도 만났다. 전성기이던 1929년 인설은 32개주에서 400만가구에 전력을 공급하는 발전업자로 떠올랐다. 문제는 돈. 자본 없이 뛰어들었기에 늘 외부에서 돈을 빌렸다. 투자자 모집, 지주회사 설립을 통해 인설은 2,700만달러의 투자금액으로 5억달러가 넘는 회사를 쥐락펴락했다. 끝없이 새로운 자본을 찾아내 사업을 확장하던 인설은 1930년대 대공황을 만나 무너지고 말았다. 사기와 횡령혐의로 고소돼 해외 도피 끝에 붙잡혀 법정에도 섰다. 논란 끝에 무죄판결을 받은 후 인설은 유럽 여행길에 올라 1938년 7월16일, 파리에서 죽었다. 전철 매표소 앞에서 심장마비로 객사할 때 옷차림은 더 없이 남루했다고 전해진다. 인설 사망 후에도 그의 기업은 살아남았고 전기는 더욱 확산됐다. 전혀 딴판이다. 기업만 망하고 재산을 빼돌린 기업인은 살아 남는 게 보통인 우리와는.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