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 평등의 함정

독일 통일 이후 15년이 지나도록 어떻게 해서 동서독 사이의 빈부격차가 더 벌어지게 됐는지 뒤돌아보는 것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갑작스러운 통일 후 독일경제는 평등의 함정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서독 노조는 동독의 값싼 노동력때문에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서 동독지역에도 동일임금을 적용하도록 요구했다. 물론 동독 사람들은 서독사람들이 자신들을 돕기 위해 동일노동ㆍ동일임금 법칙을 확립하려 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생산성이 겨우 서독의 3분의1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동독지역의 경제성장률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고 동독사람들은 동일임금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또 급격한 경기후퇴를 감수하고 도입된 사실상의 통일세도 동독지역을 위한 새로운 투자보다는 복지비용으로 주로 투입됐다. 미국 제조업은 지난 79년 이후 연평균 3%의 증가세를 기록했지만 고용은 그 해 1,940만명을 정점으로 이제는 1,400만명 수준까지 떨어졌다. 그 이유를 두고 무역적자를 탓하는 사람도 있지만 제조업의 고용감소는 결국 생산성 향상 탓이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고용 없는 성장이 계속되고 있는 셈인데 이는 기술혁신이 이뤄질 때만 가능한 것이며 기술혁신이야말로 상대적으로 노동보다는 자본에 대한 수요를 증대시킨 게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15년 가까이 부진을 면치 못하던 일본경제가 서서히 살아나고 있는 이유가 과도한 자본투입에 있다는 분석 역시 흥미롭다. 최근 몇년 동안 높은 자본투입이 없었다면 수출 중심의 일본경제는 경기부진이 아니라 아예 경기불황으로 치달았을 것이라고 하는데 평균적인 일본기업의 경우 동일한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미국기업보다 70%의 자본이 더 소요된다는 분석도 있다. 물론 경영진에 대한 주주들의 압박이 덜하고 저성장 속에서도 민간 저축액이 꾸준히 유지되는 일본에서나 가능한 일이겠지만 결국 낮은 금리에도 크게 불만이 없는 일본인들은 자본수익률 측면에서 평등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근대에 들어서 평등이라는 개념이 나타나기 전까지 가난이나 무능력은 세습의 결과였을 뿐 수치심까지 동반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담 스미스마저도 부자들이 피고용인으로부터 자신의 무한한 욕망을 채우려 하지만 결국 모든 개선의 산물을 빈자들과 나눠 가진다고 보았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평한 기회를 통한 능력주의가 사회의 근간으로 자리잡으면서 가난을 불운 탓으로 돌리는 것은 궁색해 보이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결과의 평등도 인정하기 어려워졌다. 누구나 자신의 노력으로 성공할 수 있는 만큼 가난뱅이에게 복지를 제공하는 것조차 필요악에 지나지 않는다는 관점까지 등장했다. 인위적인 경기부양을 하지 않고 성장과 분배가 조화로운 경제를 만들어간다지만 누가 봐도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이 분배에 기울어 있다는 사실은 숨길 수 없을 것이다. 최근에도 전국민의 관심사가 돼버린 청약가점제나 지역우선분양제는 차치하고라도 영세업자 가맹점의 수수료 인하, 저소득층에 대한 통신요금 할인혜택 확대에 이르기까지 시장원리에서 다소 벗어난 정책적 선택이 진행되고 있다. 물론 소득의 양극화가 가속화하고 사회안전망도 미비한 우리 현실에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성장을 국가자원의 효율적인 결합이라고 한다면 분배는 가치판단의 문제이며 어느 정도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 연말 대선를 앞두고 정책을 가다듬는 후보들도 혹시 득표에 급급해 평등의 함정에 빠지는 것은 아닌지 뒤돌아봐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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