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파이낸셜 포커스] 정치금융 폐단의 뿌리

정권 실세 찾는 해바라기 금융인… 스스로 '정치금융' 불렀다

학맥·지연… 줄서기 악습 만연

정권실세 지원설 항상 나돌아 KB·우리銀 등 인사 파행 자초


주인 없는 지배·정통성 결여… 금융권 정치화에 결정적 원인

올드보이 컴백 관행도 한 몫


지난 2012년 국민은행은 중국법인을 설립했다. 초대 법인장은 우리은행 출신인 K씨가 선임됐다. 다소 특이한 인사였다. 은행은 어떤 산업에 비해 동종업계 간 인력이동이 극히 드문 곳인데 퇴임을 앞둔 경쟁은행 인사가 중요보직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보다 주목된 것은 영입배경이었다. 특정 학교의 라인을 등에 업고 국민은행에 영입됐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당시 KB금융그룹 회장은 어윤대씨가 자리를 지켰고 은행의 인사(김형태), 글로벌(이찬근) 담당 부행장들도 모두 특정학교 출신이었다.

그로부터 1년 후, 이 특이했던 인사는 '베이징 인사파동'이라는 엉뚱한 사태로 번졌다. 임영록씨가 회장에 오른 후 베이징법인장과 부대표 2인에 대한 교체를 지시했고 한국계 은행의 잦은 대표교체를 못마땅해하던 중국 은행감독국이 강한 불만을 표했다.

다행히 양국 금융당국 간 갈등으로까지 치닫지는 않았지만 후폭풍만큼은 상당했다.

금융계 핵심 관계자는 "초대 중국법인장 선임과정 때 보고 라인에서 배제됐던 임 전 회장이 칼날을 휘두른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았다"며 "특히 국민은행 내부에서는 능력 있는 사람들을 제쳐 두고 외부인을 영입한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고 전했다.

KB금융 사태와 우리은행장 내정설 등 파행 인사가 거듭되면서 '정치금융'의 폐단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정작 이 같은 상황을 만든 것은 지난 수년, 길게는 수십년 동안 이어진 금융인들의 학맥과 지연 등에 기댄 줄서기와 편 가르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고위층 인사 때마다 금융인 스스로 실세 권력을 찾아가고 고위층의 이런 모습을 본 간부들 또한 그런 모습을 닮아가는 셈이다. 심지어 최근에는 최고위직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학맥에 있는 사람 가운데 권력자와 연결이 되는 사람을 찾아 자리를 차지하는 무기로 이용하기도 한다.


결국 금융인 스스로가 정치금융을 불렀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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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최고경영자(CEO) 선임과정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장면 중 하나가 정권 실세 지원설이다. 공교롭게도 인사 잡음이 일어날 때마다 정권 실세로 인식되는 2∼3명이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고, 진실을 추적하다 보면 모두가 사실로 드러난다. 이들 실세는 측근들을 통해 금융 당국에 인사 지시를 하고 당국자들은 이를 금융회사들에 '내려 꽂기'를 반복한다. 한 지방은행의 감사 임명 과정은 이런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당초 이 지방은행 감사는 연임이 확실했지만 은행 측은 실세 C씨 측의 요청을 받은 당국자로부터 "자리를 비워 달라"는 말을 들은 뒤 갑자기 인사 구도를 바꿔야 했다.

한 전직 은행장은 "2년 전 이장호 전 BS금융회장의 갑작스러운 퇴진 이후 금융회사들은 정치권과 당국의 눈치를 더욱 보기 시작했다"며 "CEO뿐만 아니라 이제는 부행장이나 본부장 인사 때도 정치권이나 당국자에 줄을 댈 수 있는 방법을 찾곤 한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고위층부터 말단 간부까지 모두가 정치권과 당국만을 바라보는 '해바라기 금융인'으로 전락했다는 얘기다.

주목할 부분은 정치금융 문제가 유독 은행, 그중에서도 국민은행과 우리은행에서 목격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우리금융 회장 인선을 놓고 이순우 현 우리은행장과 이종휘 미소금융재단 이사장 간의 격돌 당시에도 은행 내에서는 극심한 줄서기가 이뤄졌고 투서와 음모가 난무했다. 같은 모습이 이번에도 되풀이된 것이다. 그리고 이 투서는 인사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청와대와 당국으로 향했다. 당시 한 고위 당국자는 "정말 눈을 뜨고 못 볼 정도로 투서들이 올라온다"고 말했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주인 없는 지배구조와 이 틈을 파고든 정통성 결여된 CEO 인사 관행이다.

KB금융그룹에 정치화의 싹이 본격적으로 틔기 시작한 게 강정원 전 행장이 취임한 후부터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선진금융 도입이라는 명분을 발판 삼아 국민은행장에 취임한 강정원 전 행장은 이른바 '강정원 사단'이라고 불리는 5명의 외부인력을 은행의 주요 보직에 배치했다. 강정원 라인들은 자신들이 잘 부릴 수 있는 이들을 또다시 주요 보직에 뽑았고 그 과정에서 정통성 있는 인사의 맥이 끊기기 시작한 것이다.

금융계 고위관계자는 "외환은행은 외국계 자본으로 한 차례 넘어갔다 오면서 국내 금융회사의 고질적인 줄서기 관행이 많이 희석됐다"며 "삼성이나 현대 등의 금융계열사에서 지배구조 리스크나 후진적 인사 관행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것은 확고한 리더십이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조직을 떠난 올드보이(OB)가 다시 돌아오는 관행도 금융인의 정치화를 부추기는 요소다.

OB들은 조직에서 떠난 후 실세 정치인들을 향해 온갖 연줄을 찾곤 한다. 김대중 정부 당시의 D씨, 이명박 정부 당시의 E씨, 현 정권에서의 F씨 등은 금융계 인사를 좌지우지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한 금융계 전직 인사는 "대선 캠프가 꾸려질 때부터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줄을 대려는 금융계 전현직 인사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곤 한다"고 귀띔했다.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전 정권에 몸을 담았던 G씨는 외부인들과의 사석에서 자신이 청와대 민정 라인 쪽의 특정인과 교분이 짙다는 점을 내세우면서 일부 금융사의 CEO 인사 내용을 공공연하게 흘리기도 했다. '인사 권력'의 속성을 알게 된 이 인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줄을 바꿔 타면서 고위직에 계속해서 남았다.

이런 상황은 인사에서 속칭 물을 먹은 사람들 사이에서 집중된다. 인사 불이익을 받은 뒤 이를 만회하기 위해 회장이나 행장이 유력한 사람을 찾아가 기생하는 모습이 줄줄이 나타나곤 한다. 현직에서 물러났다가 화려하게 복귀한 한 은행의 전직 회장과 은행장은 실제로 돌아온 뒤 자신들의 측근을 본부장으로 파격 발탁하는 등 대규모 논공행상을 벌이곤 했다. 이 은행 관계자는 "그때부터 행원들 사이에는 '꺼진 불도 다시 보자' '꺼진 불은 없다'란 우스갯소리가 나돌았다"고 말했다.

일선 금융회사뿐 아니다. 금융당국과 심지어 줄 대기에서 상대적으로 정치색이 옅은 조직이었던 한국은행조차 왜곡된 인사 문화에 물들기도 했다. 한국은행은 지난 MB정권 때 인사 문제로 한 차례 홍역을 치렀다. 당시 청와대 고위층에 있던 B씨와 같은 학벌인 사람들이 승진하면서 구설수에 올랐다.

당국에서도 최근 수년 동안 인사 때만 되면 특정 간부의 학교와 고향, 정치인과의 연결 고리 등이 가장 큰 화두로 떠오르곤 한다. 당국의 한 관계자는 "인사 때마다 화두가 되는 핵심은 정권 실세와의 관계"라며 "정치 금융은 정치인이 아니라 금융당국자와 금융인들 스스로가 자초한 결과물"이라고 촌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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