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8월15일] 파나마 운하


1914년 8월15일,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뱃길이 뚫렸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400여년 묵은 염원인 파나마 운하가 완공된 것이다. 건설 구상이 처음 나온 것은 16세기. 남미 식민지에서 쏟아내는 금과 은을 스페인으로 운송하는 안전항로 확보 차원에서다. 은 생산량 급감으로 잊혀졌던 운하 건설이 재론된 계기는 1848년 캘리포니아 금광 발견. 미대륙횡단철도는 물론 마찻길도 없던 시절, 배와 파나마 횡단을 거쳐 골드러시에 합류하던 미국인들은 운하건설론을 되살렸다. 니카라과를 제치고 파나마가 후보지로 굳혀지던 무렵, 프랑스가 먼저 삽을 떴다. 시행자는 러셉스. 수에즈 운하 건설자라는 명성을 바탕으로 자본을 모집한 그는 1881년 공사를 시작했으나 암반 투성이인 험난한 지형과 황열병에 봉착, 1889년 손들고 말았다. 인부 2만명도 목숨을 잃었다. 공정 30% 상태에서 중단된 공사는 1898년 미국-스페인전쟁이 재개시켰다. 승리했지만 함대가 남미대륙을 도느라 필리핀 해전에 늦게 도착했다는 점을 중시한 미국은 프랑스 회사의 운하건설권을 사들이고 반란까지 부추기며 파나마를 콜롬비아로부터 독립시킨 뒤 1904년 공사를 시작했다. 황열병의 원인인 모기 퇴치와 증기삽ㆍ준설선 등 최신장비를 동원한 덕에 10년 만에 완성된 길이 81.6㎞의 파나마 운하는 1만4,800㎞의 바닷길을 단축시켰다. 완공 이래 94만여척이 지나간 운하 덕분에 막대한 이익을 누리던 미국은 2000년에야 운하를 파나마에 넘겼다. 통행료와 관광 등 연간 16억달러의 수익을 올리는 파나마는 운하 확장을 통해 제2의 도약을 꾀하고 있다. 애초 후보지였던 니카라과도 보다 대형의 운하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19세기 말을 달궜던 운하경쟁이 21세기에 재연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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