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1월3일] <1232> 파나마 독립


1903년 11월3일, 파나마가 콜롬비아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했다. 독립군의 병력이라야 불과 수백명. 무장도 훈련도 부족했지만 파나마는 미국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갖고 있었다. 콜롬비아 정부가 보낸 진압군은 미국 전함들에 막혀 되돌아갔다. 미국은 왜 반란을 지원했을까. 운하 때문이다. 협상이 진행될수록 많은 대가와 보상을 요구하는 콜롬비아를 상대하느니 아예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 게 낫다는 판단이 반란을 불렀다. 미국이 운하에 집착한 것은 스페인과의 전쟁을 통해 그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 샌프란시스코에 정박 중인 전함이 쿠바 해역으로 이동하는 데 3개월이 소요돼 전쟁을 그르칠 뻔했다는 경험이 운하에 목을 걸게 만들었다. 당초 후보지는 니카라과. 공사 구간이 긴 대신 땅 파기가 좋다는 이유에서 유력한 후보지로 등장했으나 파나마 지역에 밀리고 말았다. 파나마안의 최대 장점은 수에즈운하를 뚫었던 프랑스인 러셉스가 이미 구간의 40%를 완성시켰다는 점. 운하건설권을 넘기는 데 1억9,000만달러를 요구하던 프랑스 회사와 협상을 통해 4,000만달러까지 깎은 미국은 콜롬비아 정부와 협상에 나섰다. 미국은 ‘일시불 1,000만달러에 매년 25만달러 지불’이라는 조건을 내세웠으나 콜롬비아 의회는 ‘너무 적다’며 승인을 거부했다. 운하 건설이 교착 상태에 빠졌을 때 나온 대안이 바로 새로운 국가 건설. 반란은 예상대로 성공하고 미국은 신정부를 즉각 승인했다. 운하를 중심으로 폭 16㎞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의 사용권도 이때 미국으로 넘어왔다. 콜롬비아는 1923년에야 보상금 2,500만달러를 받았을 뿐이다. 새로운 국가, 파나마도 1999년에야 운하의 주권을 간신히 돌려받았다. 장구한 세월 동안 외세의 힘으로 얻은 독립의 대가를 치렀던 셈이다. /권홍우ㆍ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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