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토요 산책] 선덕여왕의 리더십


제18대 대통령선거에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우리나라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맞게 됐다. 역사상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도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된다. 신라 27대 임금, 선덕여왕의 이름은 덕만(德曼). 진평왕과 마야부인의 둘째 딸로 태어나 632년에 즉위해 16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선덕왕조 끝에 이렇게 썼다.

'…사내는 높고 계집은 낮은 것이다. 어찌 늙어빠진 할미가 안방에서 나와 국정을 좌우함을 허용할 수 있겠는가? 신라는 여자를 잡아 일으켜 임금 자리에 앉게 했으니 참으로 어지러운 세상에나 있을 일이었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


고루한 남존여비 사상의 유학자였던 김부식은 자신의 어머니, 아내도 여자인데 이런 터무니없는 망언을 했다. 조카 김춘추의 출생연도 602년을 근거로 추산하면 선덕여왕이 즉위할 때 나이는 48세 정도로 보인다. 결혼적령기가 15~16세였던 1500년 전에 여자가 쉰 살이면 할머니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선덕여왕은 총명했기에 숱한 왕족 진골(眞骨) 야심가들을 제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선덕여왕이 여자의 몸으로 왕위에 오른 것은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고 왕실에 성골(聖骨) 남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는 덕만공주가 진평왕의 맏딸이라고 했지만 삼국유사와 화랑세기에는 천명공주(天明公主)가 맏딸로 나온다. 천명공주는 뒷날 진골의 첫째 임금으로 즉위하는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모친이다. 천명공주가 맏딸이지만 폐위당한 진지왕의 맏아들로서 진골로 강등된 김용수에게 시집가 대궐에서 나가 살았기 때문에 성골 자격을 상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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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여왕의 즉위를 반대하는 세력도 있었다. 즉위 한 해 전인 631년에 칠숙(柒宿)과 석품(石品)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모두 처형당했다. 그리고 아들이 없는 진평왕의 아우 백반(伯飯)과 국반(國飯) 두 삼촌도 왕위계승권을 주장했을지 모른다. 그런 까닭에 덕만공주는 꾸준히 지지세력을 끌어모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선덕여왕이 공주 시절 김춘추의 외도사건을 해결해준 경우도 그렇다. 김춘추는 그때 이미 부인이 있었지만 외도의 상대가 공교롭게도 김유신의 누이동생이었다. 혼인도 하지 않은 누이동생이 아이를 배자 불태워 죽이겠다고 김유신이 나섰고 이를 전해들은 덕만공주가 김유신의 누이 문희를 김춘추의 아내로 맞이하도록 했다. 이를 계기로 진지왕의 손자인 몰락한 진골 김춘추와 망국 가야 출신 무인 김유신은 덕만공주의 친위세력이 됐다.

선덕여왕은 즉위 후에도 여왕의 한계를 절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위년 12월 당에 사신을 보내 즉위 사실을 알리고 조공했으며 이듬해 7월에도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는 것은 당과의 우호관계를 강화하고자 노력했다는 반증이다. 이 같은 외교활동은 고구려와 백제의 지속적인 군사적 압박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여자를 우습게 본 당 태종 이세민은 "신라에 사람이 없어서 여자를 임금으로 내세웠느냐?" 라며 신라 사신에게 모욕적인 언사로 무안을 줬다. 그래도 강적 고구려와 상대하기 위해서는 신라를 이용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 마지못해 선덕여왕을 진평왕의 후계자로 인정하는 봉작을 내렸으니 선덕여왕 즉위 3년 만이었다.

선덕여왕은 이처럼 즉위 초부터 대외적으로는 당과의 외교 강화를 통해 국가안보를 기하는 한편 대내적으로는 불교의 힘으로 민심을 통합해 안정을 기하고자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켰다. 또한 준군사조직인 화랑도를 적극 후원해 인재양성에도 힘썼다.

선덕여왕이 리더십이 부족하고 총명하지 못하거나 의지가 약했다면 16년이라는 기간 동안 신라를 다스릴 수 없었을 것이다. 이를 보면 요즈음 임기 5년간 부국강병(富國强兵)과 국리민복(國利民福)은커녕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고 사회의 양극화를 조장하는 못난 남성 대통령들은 부끄러워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남녀를 떠나 국가의 최고지도자는 출중한 리더십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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