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가 법정에서 막말을 했다고 야단들이다. 대법원이 대책을 세운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일은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실상 막말의 양상은 다양하다. 한 번은 의뢰인이 1심에서 패소한 뒤 필자에게 항소심을 새로 맡긴 사건에서 중요 인물이 아직 증인으로 신문된 적이 없어 증인신청을 해보자고 제의했더니 그가 상대방과 가까워 불리하다며 의뢰인이 불안해하는 것이었다. 간신히 의뢰인을 설득해 첫 기일에 증인으로 신청하자 담당 판사가 다짜고짜 비웃는 어조로 하는 말은 이랬다. "내가 그 증인을 믿어줄 것 같아요?"
그 말이 담당 판사의 품성과 무관하지는 않다. 그러나 판사의 막말은 품성을 넘어 구조적 문제의 성격을 띠고 있다. 문제는 막말뿐만이 아니라 막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여건이다. 이를 도외시하면 문제의 해법이 없다. 막말은 단순한 언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건과 당사자에 대한 판사의 잠재의식을 드러내는 것이며 짜증과 초조함ㆍ두려움ㆍ분노의 표출이다. 이는 인간적으로 견디기 힘든 격무가 낳은 결과이고 법정에서의 의사소통 방법에 대한 무지가 빚는 상이기도 하다.
법정은 사회의 병리적 현상이 쟁송이라는 모습으로 해결을 기다리는 곳이다. 비유하자면 병원과 같다. 그곳에 와 있는 당사자는 고통에 직면해 있다. 그들은 내 말이 옳다고, 나는 억울하다고 외치고 싶은 사람들이다. 그 청자는 친구나 길 가는 사람일 수 없으며 오직 판사여야 한다.
그런데 판사들의 사정은 어떤가. 그들은 살인적인 격무에 시달리고 있다. 판사야말로 고통스럽다. 책상은 사건기록으로 가득 차 있고 법정은 사건으로 넘쳐난다. 이런 상황에서 판사의 내면은 초조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 초인적 자제심이 아니고는 순간적인 막말의 표출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상당수 판사의 의식 속에는 내가 사건을 다 안다는 믿음이 있다. 그런데도 밉살스럽고 이악스러운 당사자가 뻔한 이야기나 사실과는 거리가 먼 듯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 것이다. 판사는 감정노동에 익숙하지 않고 시간에 쫓긴다. 그런데도 당사자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다. 여기에 법정의 딜레마가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인심은 곳간에서 나는 법, 근본적 해결책은 판사의 수를 늘리는 데 있다. 이 당연한 해답에 대해 이상하게도 여러 가지 반론이 제기돼 있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알거니와 상황은 시급하다.
다음은 재교육이다. 대다수의 판사는 고분고분한 당사자와 변호사에 익숙해져 있을 뿐 실상 법정에서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배운 일이 없다. 판사 자신이 재판하는 모습을 녹화해 듣고 보는 것이 방책의 첫걸음일 것이다. 나아가 법정에서의 소통이란 도대체 무엇인지에 관해 제대로 된 학술적 연구가 있어야 하고 그에 기초한 체계적 교육이 뒤따라야 한다. 덧붙이건대 판사에게 근엄한 도덕적 훈계를 한다고 해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