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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세계시장을 장악했던 일본의 소비가전 대기업들이 경쟁력을 잃고 무대 뒤편으로 밀려난 사이 부품소재나 산업장비 등 강한 기술력을 가진 기업들이 저력을 발휘하며 '주식회사 일본'의 부활을 견인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TV나 모바일기기 등 소비자가전시장에서 일본 기업들이 경쟁력을 잃은 반면 소비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도레이나 무라타제작소 등 중간재 제조업체들이 일본 기업실적을 사상 최대 규모로 견인하는 데 숨은 힘을 발휘하고 있다고 6일(현지시간) 전했다. SMBC닛코증권에 따르면 내년 3월에 끝나는 올 회계연도에 일본 기업들은 전년 대비 69% 증가한 25조3,000억엔의 순이익을 기록하며 역대 최고 실적을 올릴 것으로 예상된다.
이 같은 실적호조의 배경으로는 물론 달러당 110엔대 진입을 넘보는 엔저를 빼놓을 수 없다. SMBC는 올 회계연도의 주요 제조업체 순이익이 전년도 대비 116% 급증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엔저로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이고 있는 분야는 이미 경쟁력을 잃은 소비재가 아니라 일본이 전통적으로 강점을 가진 부품소재 분야다. WSJ는 2차대전 이후 일본 경제의 기적을 일군 일등공신인 부품소재 산업이 다시 한번 일본 경제 부활의 주역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1980년대 버블경제 시기에 소니·닌텐도·파나소닉 등 소비재가전 브랜드가 급부상하면서 자동차 메이커와 함께 글로벌 시장에서 '주식회사 일본'의 상징이 됐지만 전통적으로 일본의 수출 견인차는 부품소재와 공산품 등이라는 것이다.
WSJ가 대표적으로 꼽은 일본 제조업의 견인차는 글로벌 섬유업체인 도레이다. 보잉 항공기와 의류 브랜드 유니클로 등에 첨단섬유를 공급하는 도레이는 올 회계연도에 역대 최대 순익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JP모건의 제스퍼 콜 일본 담당 애널리스트는 "이런 기업들은 경제가 굳건히 발을 디딜 수 있는 다리 역할을 한다"며 "오늘은 도레이지만 내일은 올림푸스, 모레는 후지필름 같은 기업들이 이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올림푸스는 글로벌 매출의 70%를 의료장비에서 올리고 있다. 후지필름도 그래픽 시스템과 산업용 소재 분야를 점차 확대하고 있다.
소비자가전과 부품소재 기업의 달라진 위상은 증시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최근 전기산업 분야의 시가총액 상위 20개 업체를 집계한 결과 소니·파나소닉·도시바 등 소비자가전 업체들의 시총 순위는 금융위기 전인 2007년 말에 비해 줄줄이 하락한 반면 화낙·덴소·키엔스·무라타제작소 등 일반 소비자들에게 이름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높은 기술력으로 세계시장에서 입지를 넓히고 있는 부품 및 장비 업체들의 시총 순위는 대부분 상승했다. 산업용 로봇으로 유명한 화낙의 경우 9월 말 현재 시총이 2007년 말 대비 80%가량 늘며 7위에서 2위로 약진했다. 센서장치 업체인 키엔스의 시총은 2배 이상 올라 13위에서 7위로 올라섰다. 소니의 시총이 65% 감소하며 2위에서 9위로 미끄러진 것과는 대조적이다.
골드만삭스의 캐시 마쓰이 일본 담당 수석 전략가는 "소비자가전 시장에서 일본이 명백히 경쟁력을 잃은 상황에 첨단소재와 고부가가치 부품 분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히타치·도시바·NEC 등 1980년대 이후 소비자가전 사업에 뛰어들었던 대기업들도 이 같은 시장의 역류에 발맞춰 주력사업 분야를 부품소재와 장비 등으로 되돌리고 있다.
글로벌 경영컨설팅 업체인 베인앤컴퍼니의 오쿠노 신타로 파트너는 지난 10년간 높은 성장세를 유지한 일본 기업 42곳 가운데 약 3분의1은 자동차부품이나 화학·엔지니어링 등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기업들이라며 "여전히 제조업이 중심이지만 과거와는 전혀 다른 제조업으로 무게중심이 옮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