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과 러시아, 17세기 초 유럽 3대 강국 중 두 나라다. 남은 하나는 어떤 나라일까. 스웨덴이다. 사람 수가 국력으로 직결되던 시절, 인구라야 150만명 남짓한 스웨덴이 어떻게 강국으로 통했을까. 이 사람의 힘이 컸다. 구스타브 아돌프 2세. 1594년 카를 9세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17세에 왕위와 함께 혼란 국면을 물려받았다. 폴란드 국왕은 스웨덴 왕위계승권을 주장하고 선왕 때의 패전에 따른 전쟁배상금을 물어주느라 선왕의 폭압정치를 기억하는 의회는 그의 권한을 제한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전쟁배상금을 물어주느라 국고도 텅 비었다. 즉위 10여년 만에 모든 상황은 정반대로 변했다. 국가 재정이 튼실해지고 폴란드는 스웨덴 영토로 들어왔다. 의회는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는 법률을 잇따라 만들었다. 스웨덴 군대는 무적으로 통했다. 비결은 국왕이 주도한 개혁. 구스타브는 최고법원을 세우고 상설 정부기관으로 재무부와 대법원을 만들었다. 중앙부처들이 속속 들어서며 스톡홀롬도 스웨덴의 수도로 자리를 굳혔다. 구스타브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분야는 군대와 교육. 중등교육기관 ‘김나지아’를 세우고 웁살라대학에 막대한 재정을 퍼부었다. 교육을 통해 길러진 인재를 바탕으로 그는 강력한 군대를 키웠다. 용병이 주류였던 시대에 국민군 개념을 도입하고 ‘여단’이라는 전투단위도 처음으로 만들어 보병과 기병ㆍ포병 간 입체적인 작전을 강조했다. ‘북방의 사자’로 불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독일의 신규교도가 맞붙은 30년 전쟁에 개입해 연전연승하던 그는 싸움터에서도 늘 맨 앞에 서 1632년 11월6일 뤼첸전투에서 전사했다. 국왕의 갑작스러운 전사에도 스웨덴은 동요하지 않고 성장세를 이어갔다. 구스타브가 애써 구축한 행정 시스템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