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데스크 칼럼] 통상임금과 강기훈


23년 전 김기설씨의 유서를 대필하고 자살을 교사했다는 죄로 징역 3년을 복역한 강기훈 전 전민련 총무부장이 법원의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당시 '유서 대필은 조작'이라는 수많은 반증과 알리바이 등이 있었지만 법원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 결과 하나만으로 억울한 사람을 3년 동안 옥에 가뒀다.

그 이면에는 당시 재야세력을 무력화하려는 노태우 정권의 술책이 깔려있었다. 이 사건은 '팩트'가 얼마나 중요한지, 또 의도를 갖고 '팩트'를 날조하는 행위가 얼마나 비열한 짓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과 통상임금 판결은 공통점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작금의 통상임금 판결을 둘러싼 노사의 해석은 강기훈 사건처럼 '팩트'를 무시하고 있어 심히 우려된다. 지난 12월18일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시킨다'고 알려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하 대법 전합 판결)이 나오자 재계와 대다수 언론은 강력반발했다. 상여금이 통상임금에 '무조건' 포함돼 임금 폭등의 대혼란 사태가 올 것이라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이 판결 이후 통상임금 하급심들은 오히려 상여금이나 휴가비를 통상임금으로 인정하지 않고 노조 측이 이겼던 1심이나 2심을 뒤집고 있다. 왜 재계 주장, 언론 보도와 다른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는 걸까. 대법 전합 판결의 '팩트'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지난달 29일 대법원 제1부는 통상임금 상고심 판결을 했다. 기아자동차 사내협력업체인 케이알씨를 상대로 휴가비를 통상임금에 포함시켜달라고 한 근로자 A씨가 1·2심에서 승소한 사건이었다. 대법원은 이를 파기했다.

혼란 부추기는 통상임금 해석


앞서 지난 1월8일 부산고등법원 역시 대우여객 근로자 46명이 "정기상여금과 휴가비를 통상임금으로 인정해달라"고 해 승소한 1심판결을 뒤집었다. 부산고법은 이들의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가 이들 하급심을 깬 근거는 12월18일 대법 전합 판결(2012다94643)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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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전합 판결의 핵심은 '일할지급이어야 통상임금'이라는 것이다. 즉 상여금이든 뭐든 재직자만 주고 지급일 며칠 전 퇴직자에게 안 줬다면 통상임금이 아니다. 이게 이 판결의 움직일 수 없는 '팩트'다.

고용노동부가 987개 기업을 표본조사한 결과 일할기준 업체 비중은 33%로 나왔다.(중소업계는 10% 정도로 추산한다) 따라서 나머지 3분의2 기업의 근로자들은 통상임금 3년 치 소급분 소송을 해도 100% 진다. 그럼 일할기준 업체 근로자들은 무조건 이길까. 대법 전합 판결의 또 다른 핵심은 '신의칙'이다. 이는 갑을오토텍·한국GM처럼 일할지급 업체라 해도 소급 적용은 안 된다는 것이다. 대법 전합 판결이 나오자 한국GM 노조가 반발하고 세르지오 호샤 한국GM 사장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통상임금에 대해) 고맙다"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신의칙 판결의 의미는 지난 임금체계는 문제 삼지 말고 앞으로 노사가 합의해 새 통상임금 기준에 맞게 임금체계를 바꾸라고 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에 따라 노사가 합리적인 협상을 통해 새 임금테이블을 만들면 될 일이다. 물론 일부 시급제 제조업체들은 새 기준으로 인건비 부담이 커질 수 있다. 하지만 악성 분규업체 외엔 노사가 적절한 접점을 찾을 것이다. 산업현장에서 이런 얘기들이 많이 들려온다.

그렇다면 이런 '팩트'를 알려 불필요한 소 제기와 노사갈등을 막는 게 중요하다. 그럼에도 대법 판결을 충실히 반영한 고용부 지침이 나오자마자 노동계 반발이 대서특필되며 지침이 혼란을 야기한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대법 전합 판결과 고용부 지침이 완전히 똑같은 내용인데도 말이다.

노사 모두 '팩트' 뒤틀면 안돼

이는 가뜩이나 판결에 불만이 가득한 노동계에 기름을 부어주는 꼴이다. 160여건의 통상임금 재판이 노동계의 기획소송이란 점에서 더욱 그렇다. 무엇보다 노동계는 임금인상을 법원에 기대다 입맛에 맞지 않는 판결이라며 거부하는 이중적 태도를 버려야 한다. 임금인상은 노사합의가 우선이자 기본이다. 임금 문제를 과장·왜곡해온 재계(경영자총협회 등) 역시 소아적 행태를 그만둬야 한다.

통상임금 판결을 객관적이고 성숙한 자세로 사회가 수용해야 한다. 그게 민주주의고 법치주의다. 재계도, 노동계도 어느 누구도 자신만의 이익을 앞세워 '팩트'를 뒤틀면 안 된다. 그럴수록 노사분규는, 사회혼란은 심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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