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2월22일] 피시가드의 아줌마

47살 먹은 아줌마가 적군 12명을 때려잡았다. 주력인 나폴레옹 군대는 이탈리아에 있었다지만 프랑스는 국제적 망신을 샀다. 영국은 기쁨에 젖었을까. 웬걸. 경제가 거덜났다. 발단은 1797년 2월22일, 프랑스 함선 3척이 영국 웨일스의 어촌 피시가드(Fishguard)에 출몰하면서부터. 수비대는 없었다. 훈련을 나갔기 때문. 무혈 상륙한 침략군 1,200명은 약탈과 술에 빠졌다. 운신을 못할 정도로 취해버린 프랑스군은 붉은 외투에 검은 모자를 쓴 무리가 다가오자 최강 근위연대라고 생각하고 겁을 먹었지만 실은 약탈에 분노해 농기구를 집어든 동네 아줌마들이었다. 아줌마들은 취한 프랑스군을 두들겨 팼다. 우두머리격인 47살의 제미마 니콜라스는 쇠스랑을 휘둘러 사로잡은 프랑스군 12명을 감옥에 처넣었다. 급전을 받고 뛰어온 영국군이 도착하자 싸움은 끝. 영국사는 이 사건을 ‘본토에 대한 마지막 침공’으로 기록하고 있다. 프랑스는 왜 그토록 바보 같은 작전을 펼쳤을까. 지금까지 미스터리지만 프랑스는 순간의 망신으로 영국을 두고두고 괴롭혔다. 마침 프랑스 혁명의 파급에 떨고 있던 마당. 영국인들은 피시가드 사건을 나폴레옹의 본격적인 침공탄으로 여기고 은행으로 달려갔다. ‘종이돈을 금으로 바꿔달라’는 요구에 정부는 2월26일 ‘못 바꿔준다’는 긴급칙령을 내렸다. 금본위제도가 무너지자 물가가 뛰고 파운드화는 신용을 잃었다. 물가는 금 태환이 회복된 1821년에야 1797년 수준을 되찾았다. 영국은 위기를 겪으며 화폐제도를 가다듬고 잉글랜드 은행을 중앙은행으로 공식 인정(1844년)했다. 통화주의자들이 ‘불과 더불어 인간의 2대 발명’이라고 강조하는 중앙은행제도가 시골 아줌마의 완력으로 굳어졌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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