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무능력한 제도 훑는 황폐한 시선

[화제 영화] 아키 카우리스마키 '죄와 벌'거꾸로 매달린 고깃덩어리들이 꽉 차 있는 도축장. 라이카이넨이 무표정하게 도끼 같은 칼로 지나가는 바퀴벌레를 두토막 낸다. 곧 이어서 혼카넨이라는 남자의 아파트를 찾아간다. 그를 총으로 쏴 죽인다. 총을 맞은 혼카넨의 몸에서 핏덩어리가 꿀렁꿀렁 흘러나온다. 그 순간 라이카이넨의 눈빛이 흔들린다. 혼카넨은 3년전 라이카이넨의 약혼녀를 치어 죽이고도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던 인물이다. 그때 출장요리사인 에바가 들어와 현장을 목격했음에도 그를 그냥 보내준다. 경찰에 체포된 라이카이넨의 과거가 밝혀진다. 한때 법을 공부하기도 했던 그는 혼카넨이 자신의 애인을 죽인 3년전의 사건 이후 사회부적응자로 낙인찍혀 도축장에서 고깃덩이들과 씨름하며 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라이카이넨은 증거불충분으로 경찰에서 풀려난다. 많은 사람들이 벌레처럼 죽어가고 있다. 불가항력적인 천재지변이 아니더라도 전쟁, 테러, 살인 등 이데올로기 그리고 사회자체에 의해서 자행되는 폭력으로 인해서 말이다. 그런 세상을 닮아서인지 우리를 매혹시키는 영화들에서도 살인과 폭력이 난무한다. 마치 그들이 죽어가는 이유를 묻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듯. 핀란드의 괴짜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자신의 데뷔작으로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죄와 벌'은 한번의 살인이 행해지고 그를 추적하는 형사와 그를 사랑하게 되는 한 여자, 그리고 결국 경찰에서 수사를 받게되는 한 젊은이의 사건을 통해 '사람을 죽인다'는 행위의 의미, 인간과 신과 사회의 근본 문제를 던진다. 아키감독은 무대를 19세기 후반 도스토예프스키가 살았던 페체르부르그를 자신이 살아 온 20세기 말 헬싱키로 옮겼다. 그리고 주인공의 심리를 원작처럼 전지전능한 신의 위치에서 관찰하지 않는다. 대신 그 특유의 건조하고 과장없는 시선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한 남자의 심리를 냉정하게 그려낸다. 우선 원작과 달리 아키는 복수의 모티브를 도입한다. 헬싱키의 라스콜리니코프인 라이카이넨은 원작에서처럼 늙고 고약한 전당포 노파 대신 자신의 여자친구를 뺑소니로 죽인 중년의 사업가를 살해한다. 단지 자신이 보기에 사회에 무익하고 추하고 혐오스러운 벌레에 불과하다는 순전히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이유로 저질러지는 살인에, 아키는 그 살인을 위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동기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애인을 죽였는데도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난 사업가가 미워 살인을 저질렀던 라이카이넨은 자신도 그 자와 똑같이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자 경악한다. 죄를 처벌하지 못하는 사회제도의 무능력을 지적하면서 이 영화는 원작자 도스토예프스키가 집요하게 집착했던 종교적 버전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신의 구원을 믿지 않는 삭막한 현대사회의 단면을 황폐한 화면에 담아낸다. 우체부로 시작해서 접시닦기, 영화평을 잠깐 쓰기도 했던 아키는 이미 영화감독이었던 그의 형 미카 카우리스마키와 '싸이마 일미요'라는 작품을 공동 감독하면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영화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29일 개봉. 시네큐브 광화문. 박연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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