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로터리] 을(乙)을 위하여


'갑을(甲乙)'관계는 오래 전부터 있었던 현상이다. '경찰서장과 세무서장이 술을 마시면 술값은 술집주인이 지불한다'는 말은 1950년대부터 있었다. 특히 권력과 규제ㆍ예산이 많은 부처는 슈퍼갑의 지위를 누려왔다.

경제계도 마찬가지다. 납품업체는 제조업체에, 제조업체는 유통업체에 마냥 을이었다. 술값ㆍ밥값ㆍ경조사비용은 항상 을의 부담으로 남았다.


그러나 최근 '갑을 관계'는 급격한 외연확장을 이뤘다. 남양유업 사태나 대기업 임원의 대한항공 승무원 폭행 등도 모두 '갑을 관계'라는 용어로 대변되고 있다. 계약서상의 쌍방 계약자들을 지칭해왔던 '갑을 관계'가 이제는 힘이 센 자와 힘이 약한 자의 모든 관계를 상징하고 있다.

하지만 '갑을 관계'외연의 무한한 확장은 문제의 본질을 파악해 해결책을 만들어내는 데 어려움을 줄 수도 있고 시급한 현안의 비중을 희석시켜 사태의 적절한 해결을 지연시킬 수도 있다. 최근 모든 계약서에 '갑을'표기를 삭제하겠다고 하는 움직임도 문제의 본질은 표기가 아니라 관계의 내용이라는 점에서 과잉 반응이자 좋은 대처라고 할 수 없다.


사안을 분리해볼 필요가 있다. '공무원이 갑인 세상'은 반부패 문제로 접근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다. 올해 3월 국회에는 사법개혁특별위원회가 구성됐다. 특위는 상설특검이나 특별감찰관제 도입 등 반부패 제도설계가 중심적 의제이지만 핵심은 슈퍼갑인 권력형 비리의 출현을 어떻게 예방하고 적발하고 처벌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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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불평등 앞에서 정치적 평등이 무의미하게 되고 있다. 소수의 경제 집단이 다른 이들의 재산과 노동력, 삶에 대한 막강한 통제력을 거머쥐었다." 뉴딜정책을 추진했던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한 말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비대해진 경제 권력을 어떻게 민주적으로 통제할 것인지는 오래된 숙제다. 남양유업 사태는 이 문제를 다시 한 번 상기시킨 것이다. 일단 대기업과 대리점 간의 불공정행위 근절방안을 만들어야 하고 양자 간에 불평등한 계약이 벌어지고 계약 내용을 뛰어넘는 '갑'의 권력 행사가 현실로 나타나는 부분에 대해서는 처벌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납품단가 후려치기'같이 우리 사회의 많은 계약들은 각자가 가진 힘과 지식, 처한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불공정할 수 있다. 경제민주화 관련 입법이 다시 주목 받는 것은 공정한 사회에 대한 을의 염원이 있기 때문이다. 속칭 '빵 회장'이나 '라면 상무'의 등장은 이것이 전통적인 개인의 도덕성만이 문제가 아니라 경제중심 사회가 낳는 폐단이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든다. '돈'이 최고의 선이 돼버린 상황에서 가진 자가 얼마나 예의와 염치를 잃을 수 있는지, 우리 사회가 그동안 이러한 무례를 관용해온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도덕은 전통적으로 교육의 영역이었고 정치와 법의 개입은 쉽지도 않고 정당화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경제적 강자가 도덕의 영역에 침입하는 것에 대해서 이제 우리 정치권도 고민할 때가 된 것 같다. 을을 위해 우리 사회의 도덕적 갈증을 어떻게 해갈할 것인지 하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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