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사기’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부분을 꼽으라면 ‘세객(說客)’ 열전을 빼놓을 수 없다.
합종책(合從策)을 제시한 소진(蘇秦), 연횡책(連衡策)을 주창한 장의(張儀) 등 상당수 세객이 ‘세 치 혀’ 하나로 국정과 외교를 주물럭거렸다. 그래서 세객들이 화려한 삶을 살았던 것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은 비극적인 종말을 맞았다.
장의는 진나라에서 실각한 후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위나라로 망명했고 소진은 자객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웃나라를 설득하러 갔다가 끓는 물에 사람을 삶아 죽이는 ‘팽형(烹刑)’으로 인생을 마감한 ‘역이기’ 같은 세객들도 부지기수였다.
대다수 세객들이 비참한 종말을 맞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마 그들의 모습에서 ‘진정성’이 엿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아무리 번드르르한 말과 치밀한 논리를 내세워도 그것이 숱하게 되풀이되면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특히 실제 행동과 말이 다르면 상대방의 불신과 분노만 촉발할 뿐이다. 이렇게 되면 세객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상대방은 ‘조롱’이나 ‘거짓’으로 받아들인다.
사기의 說客들 비참한 종말맞아
그래도 세객들은 요즘과 비교해보면 말을 하면서도 한 차원 높은 기술(skill)을 발휘했다. 대개의 경우 상대방을 속이려는 의도를 갖고 있더라도 말만은 품격을 유지했다. 최근 일부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쏟아내는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노골적인 조롱 아니면 터무니없는 선전이다. 이러다 보니 말 한마디 내뱉기 무섭게 사회 전체적으로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청와대 홍보수석은 얼마 전 “대통령은 21세기에 가 계시고 국민은 독재시대의 지도자와 문화에 빠져 있다”는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킨 데 이어 “학(鶴)이 한 마리 있는데 국민의 70%가 검은 학이라고 하면 그게 검은 학이냐”며 여론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정치는 국민을 설득하는 게 기본이건만 아예 설득을 위한 노력조차 포기한 느낌이다.
험악한 말은 이제 정치권 인사들의 전유물만은 아닌 듯싶다. 명확한 사실(fact)과 합리적인 논리를 깔고 있어야 할 대학교수의 말조차 폭언으로 치닫기도 한다. 한 대학교수는 최근 TV토론에서 “젊은이들을 데려다 총알받이로 철책에 배치했다”는 망발로 국민 여론을 들끓게 만들기도 했다. 이 교수의 주장대로라면 대한민국 국민 모두는 살인을 방조하거나 교사한 꼴이 되고 만다.
심지어 유연한 말솜씨가 필수적인 경제 분야에서도 협박에 가까운 직설적 표현이 난무한다. 대통령이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부동산만은 잡겠다”고 선언한 후 정부 고위 관계자들은 “부동산 투기는 강도나 절도보다 더 나쁘다” “송파 신도시 부동산 투기꾼은 국세청이 평생 관리할 것”는 등의 위압성 발언을 경쟁적으로 쏟아냈다.
요즘처럼 ‘말의 홍수’가 쏟아질 때마다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전철환 전 한국은행 총재다. 전철환 전 총재는 말을 무척이나 아끼는 사람이었다. 그는 말뿐 아니라 글도 아꼈다. 꼭 필요하다면 말을 하고 글을 쓰는 것을 꺼리지 않았지만 절제의 미학을 몸소 실천했다.
한은 총재 시절 그는 기자들의 줄기찬 유도성 질문에도 아랑곳 않고 원칙적인 답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기자들은 답답한 나머지 “지나치게 말을 아끼는 것 아니냐”고 타박을 놓을 때도 많았다. 그러면 그는 “허허, 때로는 눌변(訥辯)이 달변(達辯)보다 훌륭한 법이여”라며 웃음을 지었다.
'말의 홍수'속 배려와 진실 없어
그렇다고 해서 전(全) 전 총재가 말을 못하는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그도 논쟁을 즐겼다. 하지만 논쟁을 벌이다가 상대방의 주장에 수긍하지 못할 경우에는 “혹시 이 책을 읽어본 적이 있나”는 질문으로 자신의 의사를 우회적으로 표시했다고 한다. 그는 격렬한 논쟁의 와중에서도 상대방에 대한 예의와 배려를 잊지 않았다.
남에 대한 배려나 진실이 빠진 달변이라면 그것은 욕설이나 거짓말일 뿐이다. 사회 전체를 위해서라도 이런 식의 달변은 피해야 한다. “때로는 눌변이 달변보다 낫다”는 말이 요즘처럼 절절히 가슴에 와닿을 때도 찾기 어려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