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생포된 사담 후세인(65) 전 이라크 대통령은 미국 등 서방의 압력에 맞서 20여년간 이라크를 지배한 철권 통치자였다.1937년 4월28일 바그다드 북쪽 티크리트의 티크리스 강변 농촌마을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강도에게 살해당했다는 설과 가족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설 등 소문이 구구하다. 어머니가 재혼한 후부터는 계부의 학대 때문에 더욱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어린 시절의 힘든 환경이 그를 냉혹하면서도 강인한 지도자로 만들었다고 보고 있다.
어머니의 권유로 9세 때 가출한 그는 외삼촌 밑에서 처음 학교에 들어가면서 일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바그다드의 고등학교를 거쳐 이집트 카이로 법과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기까지는 외삼촌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그는 57년 바트당에 입당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그는 59년 쿠데타로 왕정을 무너뜨린 카셈 준장을 암살하려다 실패해 사형을 선고 받기도 했지만, 68년 바트당이 쿠데타로 집권에 성공한 이후부터 승승장구했다. 그가 최고정책결정기구인 혁명평의회 부의장을 시작으로 당 사무총장, 혁명평의회 의장, 그리고 79년 7월 대통령의 자리까지 오르기 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1년이다.
그는 집권 후 이슬람의 민족주의 지도자로서 군림했다. 그가 오랫동안 공들여 구축했던 `이슬람 세계를 대표하는 지도자`라는 이미지는 한때 성공적으로 자리잡았다. 이라크 국민은 물론 요르단, 사우디 아라비아, 심지어 그에게 한때 나라까지 점령당했던 쿠웨이트 국민들까지도 후세인은 “아랍세계에서 서구 제국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민족주의 지도자” 라고 평가했다.
이라크 남부에 암약하고 있는 시아파 반군과의 종교갈등, 북부 쿠르드족과의 민족갈등 등 국가정체성의 위기도 전 국민을 하나의 강력한 지도자 밑으로 결집시키는 요인이다.
서방언론들은 후세인이 20세가 채 안 된 나이에 정치폭동에 가담한 이후 적자생존의 법칙을 뼈저리게 체득했다는 점과,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는 수법으로 대중심리조작에 능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소수의 충성파를 동원해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공포정치나 서방의 경제제재를 역이용한 교묘한 여론정치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측근이라도 의심되면 가차없이 권력핵심에서 배제한 그의 통치술은 91년 걸프전 이후 가장 큰 규모로 단행된 군·정보기관 인사에서 다시 한번 드러났다. 방공사령부, 군정보사령부, 특수보안대 등 후세인 대통령과 가족의 안전을 책임지는 3개 주요 조직의 사령관이 모두 경질된 것으로 알려진 이 인사에서 축출된 인사들은 대부분 후세인의 친척이거나 동향인 티크리트 출신들이었다.
역설적이지만 오늘날의 후세인을 만든 일등공신은 미국이다. 미국은 79년 이란의 이슬람혁명이 전 중동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후세인 정권을 적극 지원했다. 물론 배경에는 세계 석유기지였던 중동을 지켜야 한다는 경제적 이권이 크게 작용했다.
당시 미국은 독재자 후세인을 안와르 사다트 전 대통령의 반열에까지 추켜세웠다. 이 같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후세인이 지금과 같은 중동의 실권자로 부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후세인은 자신들이 만든 `프랑켄슈타인`이었다.
<황유석 기자 aquari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