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 11월14일, 영국 런던. 시장이 공포에 떨었다. ‘베어링은행 파산 위기’라는 보도 때문이다. 사실이었다. 베어링브러더스은행을 지급불능 지경까지 몰아넣은 것은 아르헨티나 부실 채권. 아르헨티나의 밀농사 흉작과 정변으로 보유 채권 864만파운드(요즘 가치 15억파운드)의 상환이 불투명해진 것이다. ‘영국이 기침하면 세계가 감기에 걸린다’던 시절, 유럽도 얼어붙었다. 남미 투자 열풍으로 1882년부터 1889년까지 유럽 각국과 미국의 아르헨티나 투자액은 누계 2억파운드가 넘었다. 마침 영국의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이 해군성의 목조전함 철갑화에 거액을 대출해준 상황. 베어링이 구제금융을 요청해도 잉글랜드은행의 실탄이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 위기감을 더했다. 두려움에 떨던 시장 참가자들은 한번 더 놀랐다. 베어링은행이 끝없이 밀려오는 지불요청을 감당해냈기 때문이다. 베어링과 잉글랜드은행의 잔고가 뻔한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잉글랜드은행의 기민한 대응 덕이다. 잉글랜드은행은 11월 초 구제금융을 결심하고 부족한 돈을 얻었다. 대상은 유대계 로스차일드금융그룹과 프랑스ㆍ러시아. 공멸을 피하고 싶었던 이들의 도움에 힘입어 1,950만파운드를 확보한 잉글랜드은행의 지원으로 베어링은 위기를 벗어났다. 각국은 불경기에 시달렸어도 대공황이라는 파국은 비켜갔다. 어렵게 살아난 베어링은 105년 후인 1995년 딜러 한 사람의 불법투자로 끝내 도산, 네덜란드 ING그룹으로 넘어갔지만 1890년 베어링 위기 당시 형성된 두 가지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국제간 거시정책ㆍ금융공조의 뿌리가 형성된 게 이때다. 최종 대부자, 즉 은행의 은행으로서 중앙은행의 중요성이 인식된 것도 베어링 위기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