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로터리 / 2월 2일] 수용과 승복의 문화가 필요하다

필자의 일본 유학시절 이야기다. 도쿄 북동부에 있는 치바현의 한 중학교에서 큰 사건이 벌어졌다. 이 학교 훈육주임이 학생 3명을 근처 해변으로 끌고 가서는 머리만 내놓고 모래사장에 묻어버린 것이다. 이들이 동급생과 하급생들로부터 상습적으로 돈을 뜯어냈기 때문이다. “이제 밀물이 들어오면 너희들은 모두 죽는다. 아무리 타일러도 말을 듣지 않으니 선량한 학생들을 위해 죽어줘야겠다.” 학생들은 겁이나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약속한 뒤 풀려났다. 그리고는 집에 가서 부모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이튿날 지역신문에 대서특필됐다. 학교는 비상이 걸려 300여명의 학부모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강당에 모인 학부모들은 피해학생ㆍ가해학생ㆍ훈육주임을 차례로 불러 사실을 파악하고 3시간여에 걸친 토론을 벌였다. 그 결과가 강당입구에 게시됐다. “우리 학부형들은 학교당국의 입장을 지지한다”는 것이었다. 가해학생의 부모들은 학교당국과 피해학생의 부모들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서울의 모 대학교에서는 차량출입이 금지된 교내에 한 학생이 차를 몰고 들어오자 말다툼 끝에 교수가 뺨을 때린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학교체벌에 대한 관심과 공방이 집중됐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학생도 잘못이 있지만 교수도 잘한 것 없다”라는 양비론(兩非論)으로 끝났다. 이 사건의 결론은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유사한 사건에 어떤 교훈도 주지 못했다. 항상 애매한 판단과 행동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올해 초 용산철거민 사망사건으로 대립과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2월 임시국회가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할 공산이 크다. 모든 사건과 문제에는 양면이 있다. 그래서 그때마다 갈등과 대립이 벌어진다. 문제는 어떤 결과가 나와도 어느 측도 확실한 승복과 수용을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시비를 가리려다 극한투쟁이 벌어지면 본질을 벗어난 새로운 문제를 야기한다. 이에 따라 끊임없는 논란과 투쟁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사회집단 간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해 갈등이 발생했을 때 이를 협의하고 조정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제도적으로 절차를 확립하고 진행과정에 대한 관행을 만들어가야 한다. 앞으로 유사한 사건이 다시 일어나면 어떻게 결론지을 것인가. 과거의 사례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가.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한다. 앞으로 몇마리의 소를 더 잃어야만 고쳐지고 해결될 것인가. 대립과 투쟁 후에는 승복하고 수용하는 문화가 이제부터라도 만들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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