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6∙25전쟁의 정전 협정 이후 김일성 주석이 1955년 김일성종합대학 물리학부에 핵물리강좌를, 1956년 과학원에 핵물리실험실을, 1965년 영변에 연구용 원자로를 신설하면서 북한의 핵개발 역사가 시작됐다.
기본 시설을 구축한 북한은 1986년 1월부터 5MW급 원자로를 흑연감속로 방식으로 가동하던 중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1989년께 원자로 가동을 중단하고 1992년 한국과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1993년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영변 특별사찰 요구에 핵무기확산금지조약(NPT) 탈퇴로 맞서다 같은 해 6월 북미 공동성명이 이뤄지면서 탈퇴를 유보하는 등 국제사회의 압력 정도에 따라 강온전략을 구사하던 북한은 1994년 북미 제네바합의를 통해 미국이 2,000MWe 경수로 원자로를 건설해주는 대신, 주요 핵시설을 동결하는데 합의했다.
하지만 2001년 미국 부시 정부가 등장하면서 갈등이 고조되고 고농축우라늄(HEU) 개발 의혹이 불거지자 2003년 1월 NPT 탈퇴를 재차 선언했다. HEU는 핵연료나 핵무기로 사용하기 위해 천연 우라늄을 농축시킨 것이다.
이어서 북한은 2005년 2월 자위를 위해 핵무기를 만들겠다고 선언했고 다음해 10월 9일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지하에서 플루토늄 방식의 첫 번째 핵실험을 진행했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유엔안보리)는 대북제재결의 1718호를 채택해 제재 수단을 높였지만 2009년 5월 25일 같은 방식의 2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유엔안보리는 또 다시 대북 제재 조치를 담은 결의안 1874호를 채택했다.
1차 핵실험의 폭발력은 1킬로톤(kt∙TNT 폭약 1,000t의 폭발력)이었고 2차 핵실험은 2~6kt가량으로 추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