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공기업의 한 사장은 최근 "옷 벗을 준비를 하던 일부 최고경영자(CEO)들이 옷을 그냥 다시 걸쳐 입었다"며 "공기업 수장들 사이에 이런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고 말했다. 청와대나 정부에서 아무 신호가 없는데 굳이 먼저 옷을 벗을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정권 출범과 함께 무더기로 바뀔 것으로 예측됐던 일부 공공기관에서는 CEO의 버티기가 최근까지 노골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나마 이런 분위기가 대통령의 미국 방문이 끝나는 것을 계기로 바뀔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다. 5년 전 이명박 정부 때처럼 이달 안에 일괄사표를 받은 뒤 재신임을 물을 수 있다는 얘기도 나왔다. 하지만 이런 구도는 다시 한번 꼬이고 있다.
정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12일 "대통령이 돌아오면 청와대와 협의해 공기업 인선에 속도를 낼 계획이었다"며 "하지만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파문으로 다시 꼬이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인선 얘기를 청와대 측에 꺼낼 수 있겠느냐"고 답답해 했다.
정부의 다른 핵심관계자는 "일부 인선이 이뤄진 곳도 장관 의중과 다른 인사들이 앉은 사례가 많다"며 "장관은 청와대 눈치만 보게 되고 자연스럽게 사표를 내는 곳은 적고 공석 중인 곳의 후임 인선도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정부 산하 공기업 중 임기 만료자를 제외하고 사의를 공식 표명한 사람은 10명이 채 되지 않는다. 금융위원회 산하 공기업 가운데 사표를 낸 곳은 강만수 산은금융지주 회장 한 명이며 산업통상자원부도 주강수 가스공사 사장만이 사표를 냈다. 국토교통부 역시 새 정부 취임 직전 임기를 사실상 1년 연장했던 한국토지주택공사(LH), 수자원공사 사장 등만 물러났고 그 밖에는 국토연구원장 등 극히 일부만 사표를 냈다.
공석이 생겨도 후속작업이 늦어져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등의 경우 두세 달이 지나서야 공모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최근 물러난 금융공기업 수장은 "나가는 날까지 후임자는 물론이고 절차에 대해 아무 얘기를 듣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인사나 조직체계 변화에 대한 명확한 밑그림이 없다 보니 곳곳에서 혼선이 일어나고 있다. 산은금융의 경우 금융당국이 회장과 행장을 분리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무산됐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직 장관은 "공공기관 수장의 교체가 신호 없이 추진되다 보니 원칙도 일관성도 없고, 결국 CEO들의 눈치보기만 심해지고 있다"며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철학 공유'를 강조한 만큼 누군가 총대를 메고 인선의 밑그림을 새로 그려야 혼선이 없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