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토요산책] 우리시대 고전읽기


소동파는 "공자 같은 성인도 그 학문은 반드시 책을 읽는 것에서 시작됐다(自孔子聖人, 其學必始於觀書)"라 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 모든 정보는 전자세계 속에 다 들어 있다. 이러한 시대에 독서란 번거로움을 넘어 엄청난 노동이다. 그것도 교양, 수양을 위한다는 추상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책을 넘겨야 하는 고통이라면 더 이상 감내하려 들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 더구나 표피적이고 감각적인 볼거리가 넘쳐나고 시청각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환상의 사이버세계도 아닌 바에야 구태여 바쁜 세상에 그러한 책에 매달리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 나아가 훈계의 극치를 달리는 고리타분한 고전! 다 알고 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할 뿐이라고 늘 느껴왔던, 뻔한 윤리도덕의 이야기, 초고속의 이 시대에 매일 몸은 녹초가 돼 곧 박제가 될 것만 같은 이 삶에 그러한 것에 눈 돌릴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그것도 당장 처세와 성공, 일확천금의 황금덩어리를 거머쥘 비결을 일러주는 것도 아니며 무슨 뜻인지 얼른 알 수도 없는 비유와 설득, 나아가 결론보다는 사례를 통해 스스로 터득하라는 부담까지 숨겨진 옛글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고전은 삶을 밝혀주는 거울이자 등불

자! 그러니 고전이다. 역설적으로 그 때문에 고전을 읽어야 한다. 힘들고 험난한 이 일상, 나아가 경쟁 속에 상처받고 세태 속에 찌들어가고 관계 속에 갈등을 빚고 빈부라는 단어만 들어도 박탈감과 소외감에 기를 펴지 못하는 이 삶. 그래서 벗어나고자 온갖 꾀를 다 부려보고 당하지 않으려고 별의별 궁리를 다해보고 분하고 억울한 심정에 "나도 술수와 궤휼로 맞대응해볼까?"라는 위험한 생각까지 들게 한다.


그렇다면 피동적이건 능동적이건 지금 내 삶이 옳은 것인가.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 나를 다시 컨설팅하고 나를 바르게 평가해줄 표준 잣대는 없는가. 대답은 "있다"다. 바로 고전이라는 거울이다. 한비자는 "사람은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볼 수 없기에 거울로 얼굴을 보는 것이요, 자신의 지혜로는 바르게 알 수 없기에 옛 성현의 도로써 자신을 바로잡는 것"이라 했다. 당 태종은 위징을 잃자 세 가지 거울 중에 옛 고전이라는 거울을 거론했고 송나라 재상 조보는 "논어 반이면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半部論語治天下)"며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얼른 들어가 논어를 보고 나와 결정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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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울 때일수록 정도로 살아라. 잘 나갈 때일수록 초심을 잃지 말아라. 잘못됐거든 원점으로 돌아가기를 겁내지 말아라. 네 마음으로 남의 마음을 헤아려라. 남을 사랑하고 아끼며 위해주고 용서하며 남에게는 완전하기를 요구하지 말며 시비를 호오로 착각하지 말 것이며 늘 고마워하고 넉넉히 여기며 홀로 있을 때 더욱 자신의 행동을 조심하며 천도를 믿고 인사를 다할 것이며 주는 것을 받는 것으로 여겨라. 어느 하나 이렇게 일러주지 않는 옛글이 있는가.

각박한 현실에서 힐링의 지혜를 찾길

그렇다면 짐 무거운 자에게 길은 멀고 잠 못 이루는 자에게 밤이 길 듯이, 이 시대 삶의 바른 길을 깨닫지 못하는 우리의 이 멀고 긴 밤길을 밝혀주는 등불이요, 거울이 바로 옛 성현의 말씀이 아니겠는가. 고전은 이처럼 전거후복(前車後覆)의 과실을 막아주고 '내 이렇게 살아도 된다'는 자신감과 안도감을 주며 아픈 상처를 아물게 해주는 힐링의 치료약이다.

이제 여름이 시작된다. 시원한 계곡물 앞에 흐르고 그 옆 절벽 위에 정자 있고 정자 뒤에 소나무 있고 소나무 위에 학이 있고 그 너머 흰 구름 한가로운 어느 산 속 바람결 속에 풀 먹인 모시 적삼 꼿꼿이 앉아 옛 책 읽기 삼매경에 빠진 옛 어떤 선비 모습 한 번 흉내 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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