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9년 9월11일, 스페인 발렌시아항. 수십 척의 배가 아랍인 남녀노소를 가득 싣고 항구를 떠났다. 목적지는 북아프리카. 스페인의 모리스코(Morisco) 대추방이 시작된 것이다. 모리스코란 개종한 무어인을 일컫는 단어. 781년에 걸친 이슬람의 이베리아 반도 지배를 종식시킨 1492년의 레콩키스타(탈환) 이후 강압에 못 이겨 기독교로 개종한 이슬람인을 말한다. 스페인은 레콩키스타 당시 남아 있던 마지막 이슬람 국가인 그라나다 왕국에 종교의 자유와 재산권 보장을 약속하고 무혈 입성했으나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개종하지 않으면 추방하겠다'며 억지로 개종시킨 것도 모자라 스페인을 무조건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스페인이 모리스코를 추방한 이유는 세 가지. 극단적인 종교 이데올로기와 오스만튀르크 제국이 침입해올 경우 모리스코의 내응 가능성 차단, 모리스코의 재산강탈을 노렸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추방령으로 모리스코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 스페인이 금과 귀금속ㆍ화폐 반출을 금지해 사실상 빈손으로 쫓겨났다. 가족도 흩어졌다. 4세 이하 어린이의 출국을 금지한 탓이다. 대추방으로 스페인을 떠난 모리스코는 모두 32만5,000여명. 프랑스로 들어간 1만3,470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새롭게 자리잡은 북아프리카에서도 모리스코는 '이슬람의 배신자'로 배척 받았다. 이교도를 내치고 재산을 빼앗은 스페인은 잘살게 됐을까. 그 반대다. 학자와 상공업자ㆍ농업기술자였던 모리스코들이 빠져나간 결과 스페인의 제조업과 농업기반이 무너졌다. 신대륙에서 들어오는 어마어마한 황금도 모자라 스페인은 수 차례 국가부도까지 겪었다. 모리스코 추방과 스페인의 몰락은 만고의 진리를 말해준다. '경제 운용의 가장 소중한 재산은 사람'이라는 진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