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建榮(전 건설부차관)
금년 고3인 K군의 경우를 가상하여 소설을 하나 써 보자.
K군은 서울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적당한 정도로 학원과외와 자율학습을 하며 공부하였다. 학교에서는 모범생이고 수재란 소리를 듣고 있다. 시험공부에 지쳐 있던 어느 가을날 그는 기쁜 소식을 듣고 집으로 달려갔다. S대의 학교장 추천대상자로 선정되었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열심히 학교를 드나들며 약을 쓴 탓이리라.
온 집안 식구가 흥분한 가운데 원서를 만들었다. 자기소개서와 수학계획서는 교수로 있는 친척의 감수를 받았다. 웬지 예감이 좋았다. 그래서 학교공부는 손에 잡히지 않았다. 다행히 1차 서류전형과 지필고사를 통과하였다. 6:1이던 경쟁이 3:1로 줄었다. 2차인 면접을 치르고도 한참을 기다린 후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학교에서 늘 자기보다 못하던 P군이 합격되고 자기는 떨어지는 바람에 실망이 컸다.
수능은 11월 중순 추운 날 오들오들 떨면서 치루었다. 그런대로 제 실력은 된 것 같아서 이번에는 S대의 비인기학과로 하향 지원하여 특차에 도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특차에 붙으면 논술고사는 필요없다. 특차에 붙겠지, 이렇게 생각하니 논술공부를 하러 학원엘 다녀도 좀체 열이 오르지 않았다. 수능을 본지 한달 후 성적표를 받아 지원한 특차 역시 또 낙방이었다.
이제 일반전형의 절차가 남았다. 제자리로 온 것이다. K군은 당초 소신대로원하던 과에 원서를 냈다. 그동안 소홀했던 논술공부에 달려들었다. 시험을 치르고 또 면접도 치루었다. 면접을 하는 교수가 눈에 익다며 재수했느냐고 물어서 K군은 쑥스러웠다. 만약을 위해 D대에도 복수 지원하였다. 그로부터 20일 가량을 초조하게 기다린 후 그는 S대 합격자명단에 자기 이름이 없는 것을 발견하곤 눈앞이 캄캄하였다. 반년 전 소위 학교장 추천으로 원서를 낼 때부터 제대로 공부하지도 못하고 서류를 만들면서 이리저리 방황하기만 한 셈이다. 그동안 입학원서를 네번 내고 논술고사를 세번, 면접을 네번 치루었다. 벌써 3수를 한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름길로 갈 생각 버리고 조용히 공부에만 전념했으면 더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을 것 같은 억울한 기분도 들었다. K군은 누구를 붙잡고 원망해야 할지 답답해서, 같이 낙방한 친구들과 밤새도록 술을 퍼마셨다. 그리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죽어도 대학엔 안 가겠다고....
이것이 우리시대의 수재소리를 듣는 젊은이들의 고달픈 모습이다. 바꾸고 바꾸어서 입시제도가 이렇게 뒤죽박죽이 되었는데 또 바꾼단다. 더 고달파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