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신년 인터뷰] 정근모 전 과학기술처 장관

젊은 아이디어 꽃피게 하는 연구풍토 만들어야 창조경제 가능<br>국가 연구비 많지만 소수에 집중… 신진 과학자는 명함도 못내밀어<br>기초분야는 단기간에 효과 안나 긴 안목으로 과기정책 세워야 <br>원자력발전 안전성 논란 떠나 리스크 관리시스템 구축이 중요



국가 연구비 많지만 소수에 집중 신진 과학자는 명함도 못내밀어

기초분야는 단기간에 효과 안나 긴 안목으로 과기정책 세우고 연구원 처우도 대폭 개선 필요


원자력발전 안전성 논란 떠나 리스크 관리시스템 구축이 중요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밝혀냈을 때는 25세도 안 됐을 때입니다. 젊은 사람들의 아이디어가 살아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근모(사진) 전 과학기술처 장관(국가원로회 이사장)은 서울 삼성동 한국전력 본사 집무실에서 가진 서울경제신문과의 신년 인터뷰에서 창조경제를 실현하려면 젊은 아이디어를 꽃피울 수 있는 연구풍토를 조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는 연구비가 많은데 큰돈을 소수에게 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큰 프로젝트를 던지고 100억원씩 툭툭 주곤 하죠. 하지만 너무 큰돈을 한 사람에게 주면 효율적이지 못합니다. 그걸 운영하는 조직이 있어야 하니까요. 또 그렇게 되면 젊은 과학기술자들이 뜻을 펴지 못합니다. 큰 프로젝트에는 젊은 과학자들이 명함을 못 내미는 구조이기 때문이죠. 그런 구조에서는 아무런 발전도 없습니다."

정 전 장관은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에 대한 이야기로 인터뷰를 이어나갔다. "최근 국가 과학기술 원로 모임에 최문기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이 와서 창조경제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사회자가 제게 창조경제가 뭔지 한마디로 얘기해줄 것을 주문하더군요. 저는 과학기술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창조경제 아니겠느냐고 답했습니다. 과학기술과 새로운 가치가 핵심 키워드죠. 생각해보면 의학도 과학기술이 있어야 발전합니다. 최근 지적재산권 소송도 많은데 이제 변호사도 과학기술을 모르면 경쟁력이 없어질 겁니다.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이 정보통신기술(ICT)에 너무 치우쳐 있지 않느냐는 지적도 있긴 한데 크게 보면 ICT 역시 과학기술의 하나입니다."

그는 다만 균형된 정책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ICT도 하고 기초과학도 해야죠. 균형 잡힌 정책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너무 금방 효과가 나타나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는 지적인데요. 금방 가시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정책도 필요하고 5년 뒤, 10년 뒤에 성과가 나타나는 정책도 필요합니다. 비율을 잘 맞추는 게 좋은 정책입니다. 장기적으로 기초연구에 투자해야 합니다. 중·단기적으로는 응용연구와 엔지니어링 등에 역량을 집중할 수 있겠죠. 기초연구는 정부에서 추진하는 게 좋겠습니다. 원자력발전소 등이 성공 케이스입니다. 과거 반대를 무릅쓰고 설립한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효과도 20년 뒤에야 나타나기 시작했죠. 30여년 전 삼성반도체에 반도체 연구개발 비용을 지원한 효과가 지금 나타나고 있는 것도 장기적인 비전의 정책이 필요한 한 사례입니다."

한국 표준형 원자로 탄생을 주도했고 우리나라의 원자력 발전과 수출에 큰 공헌을 한 정 전 장관은 최근 원자력발전의 안전성 논란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 리스크를 완전히 없애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리스크를 관리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동안 100% 안전한 것은 없습니다. 리스크는 어디에나 다 있습니다. 이 리스크를 통제하고 위험에 대응하는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도 죽을 위험은 있습니다. 자동차가 가장 안전한 때는 주차하고 있을 때인데 심지어 주차하고 있을 때조차도 사고가 날 위험은 있죠. 비행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기장에 머물러 있으면 제일 안전하겠죠. 날아가다가는 엔진이 고장 나는 등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북한이 대포를 쏜다고 하는데 이건 리스크 아닙니까. 방사능이 위험하다고 하는데 그러면 병원에서 MRI·CT는 왜 찍나요. 엄청난 양의 방사능에 노출되는데도 말이죠. 안전해야 한다는 것은 옳은 이야기지만 보다 깊이 있는 논의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는 한국보다 리스크 관리 시스템을 잘 갖춘 다른 나라의 사례를 소개했다. "리스크 관리 시스템은 위험을 인지하고 평가한 뒤 리스크가 있을 때 통제하는 것입니다. 사고가 났을 때 극복하는 과정도 거기에 포함되겠죠. 우리나라는 이에 대해 학문적인 접근 정도만 하고 있습니다. 미국도 원래 이 분야가 약했습니다. 체르노빌 사고가 난 후에 대통령 직속으로 위험관리실을 설치하고 리스크 관리에 힘을 쏟기 시작했죠. 영국도 지금은 리스크 관리를 많이 하는데 1957년 윈드스케일 방사능 유출 사고 이후부터 리스크 관리가 강화됐습니다. 중국도 위험관리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거기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많이 미흡합니다."

12대와 15대 두 차례에 걸쳐 과학기술처 장관을 역임한 그에게 현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 방향성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과학기술을 강조하고 과학기술을 통해 21세기형으로 국가를 이끌어나가겠다는 데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과학기술로 나라를 발전시키겠다는 건 초대 이승만 대통령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정책입니다. 우리나라는 1957년 국제원자력기구가 설립될 때 창립회원이었습니다. 당시 유엔 회원국도 아닌 한국이 거기에 들어갔다는 것은 지도자들이 과학기술을 통해 나라를 발전시키겠다는 집념이 있었다는 의미죠. 박정희 대통령은 1968년 원자력발전소를 짓겠다는 발표를 했고 1978년 원자력발전소가 실제 상업운전이 되도록 했습니다. 과학기술이 중요하다는 데 대해서만큼은 여야도 이의가 없었습니다."

KAIST 설립을 이끌었고 명지대 총장을 지내기도 했던 정 전 장관은 교육정책에 대한 지적과 조언도 마다하지 않았다. "창조경제의 핵심은 인력입니다. 인력양성은 교육과 훈련을 통해 가능한 거죠. 두뇌가 없으면 과학기술의 혁신도 없습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교육 시스템이 필요한데 그게 좀 보이지 않습니다. 아이디어를 정부에서 내줘야 하는데도 말이죠. 로스쿨 나온 사람이 법학자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은 실무 변호사가 되죠. 의과대학도 마찬가지죠. 학문적인 박사가 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다수는 기술을 요하는 프랙티셔너가 되죠. MD·JD도 있어야 하지만 TD(Doctor of Technology)를 길러내는 교육이 절실합니다." 그는 원자력발전소 엔지니어링 실무형 인재양성을 목표로 하는 국제원자력대학원대학교 설립추진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과학기술 인재양성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방안을 묻자 정 전 장관은 거침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TD 교육은 팀티칭(Team Teaching), 팀러닝(Team Learning)이 기본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시험을 볼 때 옆 사람 것을 보면 빵점을 줘왔죠. 그게 틀렸다는 겁니다. 앞으로 융복합 시대에는 일을 같이 해야 합니다. 학교에서 그 방법을 가르쳐줘야죠. 유아독존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시대입니다." 현장경험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산업계에서 늘 불만을 제기하는 게 있습니다. 대학 학위증이 있어도 현장에서 별 쓸모가 없다는 거죠. 인턴 프로그램처럼 현장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줘야 합니다. 미국 학생들은 재벌 자제들이어도 방학이면 인턴을 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그는 과학기술자에 대한 대우가 별로 좋지 않은 우리 사회의 문제점도 언급했다. "과학기술자들에 대한 예우가 별로이면 창조경제가 안 될 것입니다. 과학기술자로 평생을 공부하고 연구해도 대우가 안 좋으니까 학생들이 과학기술자보다는 대기업 임원이 되겠다고 하는 거죠. 과학기술자를 어떻게 양성하고, 그들의 경력관리를 어떻게 해주고, 어떠한 대우를 해줄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합니다. 과학기술자들의 연구혜택은 궁극적으로 온 국민, 나아가서는 전세계인이 받게 됩니다. 인력양성은 아이디어가 중요합니다. 돈으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전세계를 관조할 수 있는 넓은 시각과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력을 육성해야 한다는 점도 역설했다. "글로벌 시장을 모르고는 이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해외에 가보고 거기서 생활해봐야 합니다. 같은 와이셔츠라고 하더라도 한국 사람, 아프리카 사람이 입는 디자인이 다릅니다. 서로 다르게 디자인해야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다는 얘기죠. 세계가 국제화되고 있는데 거기에 뒤처지면 안 됩니다. 과거 원자력발전소에서 일했던 사람들은 발전기 매뉴얼 등을 한국말로 번역된 것을 사용했습니다. 한 세대의 원자력 기술자들은 전혀 영어를 못 했죠. 해외 수출 원전건설 현장에 가보면 영어로 관련 기술에 대해 질의하는데 과거 우리 엔지니어들이 신속히 대응하지 못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게 바로 마켓인데 말이죠."


■정근모 전 장관이 보는 초일류 국가론

관련기사



일한 만큼 대우 받는 정직한 사회 분위기 조성해야

바른 인격 함양하는 교육

지속가능 에너지 환경도 중요

정근모 전 과학기술처 장관은 오랜 기간 국가발전을 고민해온 원로답게 한국의 발전방안에 대한 혜안도 내놓았다. 그는 우선 한국이 좋은 기반을 이미 갖췄다는 말로 운을 뗐다.

"우리나라는 현재 대학에 진학하는 사람이 85%입니다. 국민들은 깨어 있고요. 언론과 집회의 자유가 보장돼 있습니다. 북한은 항상 공포 속에서 살고 있지만 한국은 그런 종류의 공포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굉장한 찬스가 이미 주어져 있는 셈이죠."

그러면서 그가 첫번째로 강조한 것은 다름아닌 '정직'이었다. "노사갈등도 사회가 투명하지 않고 정직하지 않으니까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강권으로 노동운동을 하거나 그것을 또 강압적으로 제어하는 것은 사회를 삐뚤어지게 하는 겁니다. 박근혜 정부가 원리원칙대로 하겠다고 하는데 그게 쉽지는 않을 겁니다. 사회 전반에 부정직한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짜로 일한 사람들이 혜택을 받도록 하는 것도 정직과 관련이 있습니다. 특정 프로젝트의 성과가 나왔을 때 단지 소장 또는 관리자라고 해서 실무자보다 혜택을 더 받으면 그건 잘못된 거죠. 전 진짜 일한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려다 보니까 장관 시절 욕도 많이 먹었습니다."

두번째로는 인격을 함양하고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을 제시했다.

"부모들은 85점을 받았는데 자녀들에게는 100점을 요구하는 건 비합리적인 사고입니다. 아이들을 무리하게 많은 학원에 보내는 것도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교사와 학생들이 신뢰 속에서 함께 공부하고 학생들이 교사를 존경할 수 있는 풍토를 만들어줘야 합니다. 교육의 근본은 품성계발입니다."

과학기술과 에너지 분야의 구루답게 과학기술경제와 지속 가능한 에너지 믹스도 초일류 대한민국 발전방안으로 들었다. 정 전 장관은 "아직 원자력은 가장 중요한 에너지 옵션"이라며 "재생에너지를 쓰는 것에 대찬성이지만 아직 재생에너지는 너무 비싸다"고 지적했다.

이 밖에도 그는 지역 안보체제 구축, 복지정책을 통한 서민 일자리 제공, 서민들을 위한 저금리 금융, 세계적인 문화시민 양성 등이 필요하다고 힘줘 말했다. "우리 정부가 하려고 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국민들의 사고방식을 바꿔놓는 작업도 병행돼야 하겠죠. 다만 대통령 임기 내에 이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을 겁니다."

끝으로 박근혜 정부가 남은 임기에 중점적으로 추진해야 할 과제를 묻자 정 전 장관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던 시절에 만났던 장 크레티엥 전 캐나다 총리의 이야기로 답변을 갈음했다.

"크레티엥 총리는 일일이 언급하기가 힘들 정도로 여러 부처 장관을 지냈습니다. 그가 장관이 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부처가 풀어야 할 문제를 적은 리스트를 아랫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자신이 임기 동안 해결할 문제를 3개 선택하고 차관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임기 동안 선택한 문제만큼은 반드시 해결되도록 했습니다. 장기적으로 풀어야 할 과제의 경우 실무자들도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임기가 끝나도 정책이 지속적으로 추진되도록 하기 위해서였죠. 이렇게 했더니 실제로 문제가 해결됐을 뿐만 아니라 윗선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게 됐다고 합니다."

◇약력 △1939년 서울 △1959년 서울대 물리학과 △1960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과정 수료 △1963년 미국 미시간주립대 대학원 이학박사(응용물리학) △1966~1967년 미국 MIT 핵공학과 연구교수 △1967~1971년 미국 뉴욕공대 전기물리학과 부교수 △1971~1975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 부원장 △1982~1986년 한국전력기술 사장 △1977~1978년, 1986~1987년, 2009년~한국전력공사 고문 △1988~1990년 한국과학재단 이사장 △1990년, 1994~1996년 대한민국 과학기술처 장관(제12대 및 제15대) △1992~1994년, 1998년 고등기술연구원 초대·2대 원장 △2000~2004년 호서대 총장 △2004~2007년 명지대 총장 △2004~2007년 한국과학기술한림원장 △2010년~한국전력 국제원자력대학원대학교(KINGS) 설립추진위원장, 국제자문위원장

사진=김동호기자

대담=오철수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