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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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끝나고 세상이 어수선하던 시절. 경상도 한 시골마을에 화선지와 붓만 쥐어주면 하루종일 시간가는 줄 모르고 그림을 그리던 어린 소년이 있었다. 전쟁 통에 부모를 모두 여의고, 왼팔마저 잘려나가는 아픔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소년에겐 그림이 있어 행복했다.
그에게 스승이라곤 오직 동네 사랑방을 뒹굴던 고서가 전부였다. 그림에만 빠져 있었던 소년은 커서 화가가 됐고, 학맥과 인맥 없이는 발도 들여놓기 어려웠던 70년대 국전에 8번이나 입선하고, 79년에는 중앙미술대전에 대상을 차지하며 미술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고된 독학의 길을 걸어온 그는 겸재ㆍ변관식ㆍ이상범에 이어 실경산수의 맥을 잇는 작가로 명성을 얻었다.
평생 수묵화를 그리며 현대화 가능성을 열어가는 박대성(62) 화백이 6년 만에 가나아트센터서 개인전을 열고있다.
10년 주기로 화풍이 바뀌어 온 그가 2000년 경주로 작업실을 옮긴 후 처음 여는 개인전이다. 화강암 위에 두드려 낸 찍어낸 탁본 방식과 세필로 그린 그림이 어우러져 예전보다 더 힘이 넘치고, 천연염색 안료를 과감하게 도입해 사색적인 수묵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탁본과 세필 그림의 조화는 그간 다양한 실험을 거친 새로운 기법이다. 그는 "거칠면서도 질박한 화강암의 특성이 우리 품성에 어울린다는 판단에 종이를 대고 두드렸다"며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탁본은 한국 전통화법인 간결한 수묵을 현대적인 감각에도 어울리게 만들 수 있는 기법"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에는 경주ㆍ금강산ㆍ서울 등을 그린 최근작 60여점이 선보인다. 4호 크기의 소품부터 200호가 넘는 대작까지 다양하다. 눈길을 끄는 것은 12m에 이르는 대작 '법열(法悅)'. 석굴암 본존불과 십대 제자상을 그린 작품으로 먹을 머금은 바탕 위에 색채를 전면으로 떠오르게 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점으로 이루어진 화려한 화면은 은은한 농도로 번져간다.
천연안료와 먹의 조화가 일품인 민화풍의 수묵화도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작가는 "뉴욕 부르클린 뮤지엄에서 어린이를 대상으로 동양화 수업을 하고 있는 요즈음 우리가 한국화를 연구하지 않으면 우리 그림은 더 이상 설 땅이 없다"며 "옛 그림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실험을 통해 현대적인 감성에 어울리는 기법을 찾아내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전시는 10월 1일까지. (02)720-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