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로 여는 수요일] 사색의 다발


사색의 다발-이기철 作

구름 흩어지고 나면 골짜기는 온통 달빛의 모래밭이다


높은 곳에 둥지 튼 새들은 가장 늦게 어두워지고 가장 먼저 그날의 햇빛을 받는다

상수리 열매는 무거워서 떨어지는 것 아니고 제 열매가 익어서 떨어지는 것이다


온종일 느티 그림자가 땅 위를 비질해도 가랑잎 하나를 옮겨놓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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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탕물은 아무리 흐려도 수심 위에 저녁별을 띄우고

흙은 아무리 어두워도 제 속에 발 내린 풀뿌리를 밀어내지 않는다

벼랑 위의 풀뿌리는 제 스스로는 두려워 않는데 땅 위에 발 디딘 사람들만 그 높이를 두려워한다

겨울 나무의 바람 소리는 바람이 우는 것인가 나무가 우는 것인가

즐거움은 쌓아둘 곳간이 없고 슬픔은 구름처럼 흘러갈 하늘이 없다


구름 속 달빛을 종종 잊었죠. 가장 빨리 어두워지고 가장 늦게 밝아지는 골방에도 숨었죠. 익기 전에 무거워지곤 했죠. 먼지 풀풀 날리게 비질도 했죠. 내 수심에 너의 얼굴 비추지 못했죠. 지하철 부딪는 구둣발 슬며시 밀어냈죠. 높이가 두려워 벼랑을 포기했죠. 바람도 나무도 아니고 내가 울었죠. 즐거움을 쌓으려 슬픔의 곳간을 지었죠. 그러나, 아무리 비천한 삶도 비의 가득한 우주를 껐다 켜는 절대 눈꺼풀을 지니고 있죠. <시인 반칠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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