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은행 경영권 지분 매각에 회의적 기류가 확산되는 가운데 정부가 '모양새 좋게' 매각을 철회(딜드롭·deal drop)하는 방법을 놓고 딜레마에 빠졌다. 인수 후보들이 이미 부적격하다는 판단이 나왔고 무리하게 매각하지 않겠다는 방침도 세워졌지만 입찰 자체를 무산시킬 명분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입찰 전 당국이 매각계획을 철회할 수도 있으나 "직을 걸고 민영화를 이루겠다"는 신제윤 금융위원장의 발언에 위배돼 쉽게 꺼내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현재로서는 일단 예비입찰을 진행하고 대주주 적격성 등을 근거로 후보들을 탈락시키는 방법이 유력해 보인다.
하지만 이 경우 예상 밖 후보들이 입찰에 참여할 가능성이 있는 점이 당국의 큰 고민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잠재 인수 후보는 교보생명과 중국 안방보험, 대만계 자본 등 3곳. 이 중 교보가 인수 의사를 접은 뒤 중국이나 대만 자본 중 한 곳을 적격성 심사에서 탈락시켜도 추가로 또 다른 후보가 나타나고 당국이 이들을 무리하게 탈락시키면 외교적 문제로 비화할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외국계에 넘기는 상황을 배제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낮아지는 교보생명 참여 확률…외국계 간 경쟁?=우리은행 경영권 지분 입찰에는 2개 이상이 참여해야 유효경쟁이 성립된다. 국내 유일한 후보인 교보생명은 지난 18일 이사회에서 예비입찰 참여를 위한 가격범위·수량범위 등 가이드라인을 정했으나 최종 결정을 경영위원회에 맡긴다며 공식 참여 발표를 유보했다.
금융계에서는 교보생명이 금융당국의 의중을 잘 알고 있는 만큼 결국은 인수를 포기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금융당국은 이미 비공식적으로 교보생명에 우리은행 대주주로서 부적합하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교보도 당국에 이를 수용할 뜻을 비친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외국계 자본이다. 아직까지는 안방보험과 대만의 한 자본이 인수 의사를 타진하고 있다. 금융계의 한 고위관계자는 "뚜껑이 열리면 예상 밖 후보들이 나타날 수 있다"며 "한국과 중국이 최근 자유무역협정(FTA)을 타결한 만큼 중국 자본 입장에서는 우리은행이 더욱 매력적인 매물이 될 수 있다"고 전했다. 대만계 자본은 산업자본으로 알려졌는데 이곳이 적격성 심사에서 탈락해도 문제가 남는다.
추가 후보군이 나타날 경우 유효경쟁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외국계끼리 경쟁하고 당국이 고립되는 상황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외국계 무리하게 탈락시키면 외교 분쟁 가능성=2008년 영국계인 HSBC가 외환은행 인수를 추진하던 당시 국내에서 부정적 기류가 확산되자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HSBC의 외환은행 인수가 속히 이뤄질 수 있도록 해달라는 서한을 보냈다. 외환은행 매각이 외교 문제로 비화된 시점이다.
외국 자본 간 유효경쟁이 되면 이 같은 외교 분쟁은 충분히 재발할 가능성이 크다. 당국은 실제로 외환은행 매각시 HSBC마저 금융주력자인지 알아봐야 한다면서 산더미 같은 서류를 요구하는 등 외교적 마찰을 초래했다. 이번에도 당국이 중국 자본에 대한 국민적 반감 등을 고려해 후보를 탈락시키게 되면 중국의 반발이 뒤따를 것으로 전망된다.
금융당국 고위관계자는 "한중 FTA의 막판 협상이 진행되는 미묘한 시점이기 때문에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이 생길 경우 당국의 입장은 매우 곤혹스러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예비입찰 전 딜 무산 목소리=이 때문에 당국 내부에서는 오는 28일 예비입찰 전 매각계획 자체를 철회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입찰 후 생길 변수들을 현시점에서 통제하기가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매각작업을 중단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민영화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했기 때문에 우리은행은 공적자금 회수보다 금융산업 발전이라는 큰 틀에서 봐야 한다는 근거에서 나온다. 당국 관계자는 "지방은행과 우리투자증권 매각 등으로 민영화는 상당한 목표를 달성했다"며 "차후 대형 금융지주 등의 체력이 회복되면 괜찮은 후보들 간 경쟁구도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딜을 무조건 중단하기에는 명분이 부족하다. 신 위원장은 이미 "직을 걸고 우리금융 민영화를 추진하겠다"고 공언해왔다. 박상용 공적자금관리위원장도 6월 "주인 있는 은행이 하나쯤 나와도 문제가 없다. 개인이 최대주주라고 해서 안 될 것은 없다"는 소신을 밝혔다. '조속한 민영화'라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도 여전하다. 당국으로서는 퇴로를 위한 확실한 명분이 필요한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