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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골프 고수향 나네

"경비 아끼려 22시간 이동·무료 민박

LPGA 2부 시절은 내겐 재미난 경험"

지난달 미국 무대 첫 우승으로 이름을 알린 이미향은 12일에는 KLPGA 투어 현대차 중국여자오픈에도 초청선수로 출전한다. /이미향 제공

고교 3학년 때 미국으로 직행…LPGA 투어 2년만에 올해 첫 승
중학교 때 박세리 언니 조언에 항공기 승무원 꿈 접고 전향
"세리 언니처럼 제 이름 건 대회 만드는게 목표예요"


"경비를 아끼려 숙소는 주최 측에서 제공하는 하우징(무료 민박)을 이용하고 이동은 주로 차로 했죠.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서 뉴욕까지 차로 22시간 걸린 적도 있어요."


고등학교 3학년 때 미국으로 건너가 3년 만에 세계 최고 무대인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정상을 밟은 이미향(21·볼빅). 그는 어려웠던 LPGA 2부 투어(시메트라 투어) 시절을 돌아보면서도 "힘들지만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재미있었다"며 웃었다.

지난달 9일 LPGA 투어 미즈노 클래식(일본 미에현 시마시)에서 5차 연장 드라마 끝에 데뷔 첫 승을 거둔 이미향을 지난 3일 밤 서울 영등포구의 한 쇼핑몰에서 만났다. LPGA 투어 두 번째 시즌을 마치고 2일 귀국한 그는 오랜만에 뭉친 10년 지기들과 영화도 보고 맛집에서 수다도 떨며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국 선수들이 올 시즌 거둔 LPGA 투어 10승 가운데 이미향의 1승은 조금 특별했다. 어린 나이에 국내 투어 대신 미국을 선택한 데다 2부 투어에서 숙성을 거친 흔치 않은 과정이 그의 우승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이미향은 "누구나 가고 싶어하는 무대를 한 살이라도 어렸을 때 도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고생도 일찍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으로 간 건데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고 돌아봤다.


◇우승 상금 1,600만원, 그래도 행복했던 시절=이미향은 신지애의 모교로 유명한 함평골프고 출신이다. 하지만 신지애처럼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를 거치지는 않았다. 초등연맹 임원인 아버지 이영구씨의 권유와 중학생 때부터 이미향을 후원해온 문경안 볼빅 회장의 조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본인의 도전 의지가 강했다. 처음에는 일본을 가려다 일본 투어 퀄리파잉(Q)스쿨 최종전과 미국 투어 최종 시험이 겹쳐 미국을 택했다. 그때가 고3이던 2011년. 이미향은 "선배들은 미국 투어는 체력적으로 힘들고 말도 안 통해 더 괴롭다고 했지만 왠지 겁이 나지 않았다"고 했다. "Q스쿨 칠 때도 떨리지가 않더라고요. 뭐가 뭔지도 모르니 겁 없이 공만 쳤던 것 같아요." Q스쿨 최종전 성적은 29위. 다음 시즌 LPGA 투어 풀시드를 받지는 못했지만 조건부 시드로 6개 대회에 나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2012년 주 무대는 2부 투어였다. 어머니는 친정인 전남 광주에 머물고 아버지가 외동딸의 매니저이자 운전기사·캐디 노릇을 했다. 지인이 사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소도시 컬럼비아에 터를 잡고 미국 전역을 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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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투어 첫 우승은 9월에 터졌다. 마지막 날 5타 차를 뒤집었다. 하지만 상금은 1만5,000달러(약 1,600만원). 비행기 대신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로 20시간을 이동해 대회에 나가고 호텔 대신 민박을 이용하는 생활이 계속됐다. 한 푼이라도 아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향에게는 당시가 불우했던 기억이 아닌 듯했다. 그는 "하우징을 이용하면 호텔 방 2개를 잡는 데 들어갈 돈을 아낄 수 있다. 음식도 정말 잘해주시고 다들 친절하게 대해줬다"며 "1부 투어와 비슷하게 돌아가는 2부 투어를 통해 이동이라든가 체력 관리에 요령이 생겼고 대회를 준비하는 연습 방법도 배웠다"고 했다. "2부 투어에서는 상금순위 상위 10명만 다음 해 1부 투어에 올라가요. 그런 압박감이 큰 경험이 됐고 말이 안 통해도 계속 부딪치면서 외국선수에 대한 낯섦도 사라졌어요." 2부 투어 첫 시즌에 우승 1회 포함, 상금 6위(4만6,000달러)에 오른 이미향은 신인왕까지 차지하며 한 시즌 만에 바로 1부 투어로 승격했다.

◇7m '멍군 버디' 난생처음 느낀 전율=꿈에 그리던 LPGA 투어 무대를 밟았지만 첫 시즌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초반 5개 대회에서 연속 컷 탈락하는 등 좀처럼 제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해 최고 성적은 공동 19위. 지칠 만도 했지만 이미향은 느긋하게 생각했다. "어차피 1부 투어 첫 우승은 오는 2015년이나 2016년쯤은 돼야 나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때까지는 경험을 쌓는 기간이라고 여겼죠."

LPGA 투어 첫 승의 감격은 생각보다 훨씬 일찍 찾아왔다. 지난달 미즈노클래식에서 이미향은 이일희, 고즈마 고토노(일본)와 빗속 5차 연장 혈투 끝에 우승 상금 1억9,000만원을 거머쥐었다. 2년 전 2부 투어 우승 때 받은 상금의 10배였다. 3차 연장에서 고즈마와 이일희가 잇따라 10m 버디를 잡자 이미향은 엄청난 부담감을 이기고 7m 버디를 집어넣었다. 5차 연장에서는 190야드 거리에서 두 번째 샷을 홀 50㎝에 붙여 우승을 확정했다. 손꼽힐 만한 명승부였다. 이미향은 "3차 연장에서 이일희 언니까지 버디를 넣는 순간 '헐'이라는 말밖에 안 나왔다. 그냥 신기할 따름이었다"며 "나는 사실상 포기 상태였다. 넣어야겠다는 생각도 전혀 없었다"고 돌아봤다. "퍼트가 짧으면 평생 후회할 테니 홀을 지나가게만 치자는 생각이었어요. 들어가는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태어나서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죠." 5차 연장에서 신기의 하이브리드 샷은 그린을 넘어가는 줄 알았다고 했다. "운이었죠, 뭐."

이미향의 운은 앞서 올 2월부터 풀리기 시작했다. 볼빅 추천선수로 나간 유럽 투어 뉴질랜드 여자오픈에서 정상을 먼저 경험했다. 선두에 8타나 뒤진 채 출발한 마지막 날, 이글 1개와 버디 7개를 몰아쳤다. 리디아 고를 1타 차로 제치는 우승. 리디아는 미즈노 클래식 우승 때도 축하 연락을 해왔다고 한다. 대회 기간 구토와 설사로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던 이미향은 최종일 전날 밤 신김치로만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운 뒤 거짓말처럼 싹 나았다. 그는 "뉴질랜드에서의 우승으로 내 골프에 자신이 생겼다"고 말했다.

◇진로 바꾸게 한 박세리의 한마디=네 살 때부터 골프채를 잡았지만 이미향은 골프선수가 아닌 항공기 승무원이 되고 싶었다. 그랬던 이미향을 바꿔놓은 건 박세리의 조언이었다고 한다. "중학교 시절 스카이72 골프장에서 열린 행사 때 박세리 언니랑 같이 라운드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언니의 말을 듣고 '이 언니처럼 돼야지'라고 처음 생각했죠." 수년 전 들었던 조언을 이미향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주니어 때 치던 것보다 지금의 네가 훨씬 잘 치는 것 같다. 오늘 68타를 쳐도 내일 78타를 칠 수 있는 게 골프다. 경기할 때만은 자신이 최고라는 생각을 놓지 마라." 아직 우승 경험이 없어 걱정이라는 여중생의 진지한 고민을 박세리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지금도 이미향의 목표는 박세리처럼 되는 것이다. 그는 "최근에 언니 이름을 건 '박세리 인비테이셔널' 대회가 열렸다. 그렇게 대회에 자기 이름을 내걸 만한 선수가 되는 게 제 목표"라고 밝혔다. "저는 아직 평범한 선수예요. 우상인 박세리 언니의 길을 잘 따라가고 나중에는 우상보다 조금은 더 나은 선수가 되는 게 더 큰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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