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기업퇴출 한달] "신속 구조조정" 실종
'11ㆍ3 기업퇴출'발표 이후 한달이 흘러갔지만, 당초 공언했던 '신속한 구조조정'은 기대에 못미친 채 곳곳에서 후유증만 터져나오고 있다.
은행장들은 지난 11월3일 부실징후기업에 대한 신용위험 평가결과를 발표하면서 "살릴 기업은 확실하게 살리고, 가망이 없는 기업은 하루빨리 퇴출시키겠다"고 강조했으나 한달이 지난 지금 상황은 기대와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살리겠다고 한 기업은 금융기관들의 지원이 부족해 죽어가고 있고, 퇴출시키겠다고 한 기업은 이런저런 이유로 언제 퇴출될지 기약하기 어렵게 됐다.
◇'법원'이 끼면 한발 물러선다
지난 29일 주택은행에서 열린 '대동주택 채권단 협의회'는 '참석률 제로'라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채권단이 낸 대동주택의 화의 취소 신청에 대해 법원이 기각 결정을 내리자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으나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주택은행의 담당자는 "은행에 근무하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라며 "금융기관들이 법원 결정에 부담을 느낀 것 같다"고 밝혔다.
법정관리나 화의중인 기업의 청산 방침에 대해 법원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구조조정 일정은 자연히 늦어지고 있다. 퇴출 발표후 하루빨리 부실기업을 청산하겠다고 나선 은행들은 요즘 법원이 끼면 "법원의 결정만 기다리고 있다"며 한발 물러서고 있다.
한 시중은행 여신 담당자는 "법정관리 기업은 채무가 면제되니까 이익이 나는 것은 당연한데 법원이 이를 근거로 회생 판정을 내리고 있다"며 "이들은 사실상 살아남기 힘든 기업이지만 퇴출이 늦어지면서 은행과 다른 기업에 부담을 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진전없는 매각작업
매각 결정이 난 기업은 오직 '추진중'이라는 꼬리표만 붙어 있다.
한달이 지났지만 실제로 매각되거나 구체적인 인수자가 나타난 곳은 하나도 없다.
현재 퇴출 기업중 매각사례는 맥슨텔레콤이 세원텔레콤에 팔리고, 대우통신의 정보통신 부문이 미국의 CVC(씨티 벤처 캐피털)에 매각된 정도다. 모두 퇴출 판정이 나기 전에 매각이 결정된 기업들이라 새로울 게 없다.
매각 결정이 난 진도의 주채권은행인 서울은행은 "지난 9월부터 원매자를 물색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접근한 곳은 없다"고 말했다. 다른 매각대상 기업들도 대부분 마찬가지다.
전문가들은 매각이 지지부진한 이유를 '많이 받기 위해 너무 따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한보철강은 이리저리 재다가 매각에 실패해 현재 큰 짐이 되고 있지만 기아자동차는 헐값 매각이라는 비난을 받고도 빨리 팔아 지금 잘 돌아가고 있다"며 "기업이 망해서 매각해야 할 때는 하루라도 앞당기는 게 최우선"이라고 강조했다.
◇무기력한 은행
피어리스는 청산 결정이 난 뒤 워크아웃이 중단되자 은행과 상관없이 자체적으로 M&A를 추진하고 있다. 채권은행은 손놓고 기다리고만 있다. 물리적으로 개입할 수단이 없을 뿐 아니라, 말이 먹히지 않는 분위기이기 때문.
삼익건설도 청산 결정이 나자 자체적으로 사적화의를 추진하고 있다. 은행권의 채권비율이 24%에 불과하고, 76%가 개인 채권자이기 때문에 사적화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퇴출판정을 받은 기업들중 노골적으로 채권단을 무시하는 곳이 적지 않다.
퇴출 발표이후 은행에는 연일 관련기업 직원들이 몰려와 집회를 갖고 있다.
청산 결정이 난 한국종합화학 직원들은 지난달 29, 30일 이틀동안 산업은행 본점 앞에서 거세게 시위를 벌였다. 직원이나 고객들이 제대로 은행에 들어오기 어려웠을 정도다. 서울은행, 한빛은행 등 다른 은행들도 퇴출 발표이후 해당 기업들이 반발하며 시위를 벌이는 통에 심한 몸살을 앓았다.
◇구색갖추기용 퇴출
당초 방침대로 신속하게 퇴출 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기업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은행장들이 모여 떠들썩하게 발표하는 행사가 없었더라도 퇴출이 예정됐던 기업들이다.
미주실업은 퇴출 발표 전에 법원에서 법정관리가 부결돼 청산 절차에 들어가고 있었다.
법정관리 상태였던 대한중석은 청산을 위한 법정관리 계획이었기 때문에 청산 결정이 난 것은 당연했다. 해태상사도 법원에서 법정관리 인가안이 부결돼 청산이나 파산을 결정해야 했다. 기아인터트레이드는 지난 7월 법원에서 파산 선고가 났으며, 우성건설은 관리인이 스스로 법정관리 폐지 신청을 냈다.
은행의 한 관계자는 "퇴출 리스트중 상당수는 숫자 채우기용이라는 지적이 많다"며 "진짜 퇴출 작업에 들어가야 할 기업들이 이들에 가려 지연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상연기자
입력시간 2000/12/01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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