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별세한 공옥진(사진) 여사는 파란만장한 일생의 희로애락을 자신만의 해학적인 춤과 한 맺힌 소리로 펼쳐내며 서민과 함께한 시대의 예인이다. 한과 흥이 뒤틀린 춤으로 진하게 풀어져나올 때 사람들은 진저리를 치고는 했다.
고인은 판소리 명창 공대일 선생의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창을 배웠고 10세를 전후해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무용가 최승희의 집에서 일하며 춤을 배우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경찰관의 아내로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절에 들어갔다가 환속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1940~1960년대에는 임방울 창극단, 김연수 우리악극단, 박녹주 국극협회 등 여러 국악단체에 참여하기도 했다. 10여년간 전남 영광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다 1978년 서울 공간사랑 개관 기념공연에서 전통무용에 해학적인 동물 춤을 접목한 '1인 창무극'을 선보이며 주목 받기 시작해 수십년간 서민ㆍ젊은이들과 함께했다.
동양인 최초로 미국 링컨센터에서 단독공연을 했고 일본ㆍ영국 등의 공연을 통해 가장 서민적인 한국 예술을 선보인 것으로 평가 받아왔다.
1998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고인은 2004년 공연을 마치고 나오다 다시 쓰러졌고 교통사고까지 당해 무대에 서지 못했다. 2007년 국민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돼 매달 43만원의 생활비를 받아 근근이 생활해왔다. 투병 전 사비를 들여 키우던 제자들도 하나둘 떠나면서 그의 예능은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1인 창무극이 무형문화재로 인정 받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1999년 전남도 문화재위원회는 1인 창무극을 심의했지만 '전통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창작한 작품'이라는 이유로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지 않았다. 2010년 5월 마침내 '판소리 1인 창무극 심청가'로 전라남도 무형무화재로 지정예고되고 그해 11월 최종 인정됐다.
지정예고 한 달 뒤인 그해 6월, 5년 만에 '한국의 명인명무전'으로 국립극장 무대에 오른 공 여사는 "맺히고 맺힌 한을 풀었다. 이제는 죽어도 원이 없다"며 혼신의 힘을 다한 생애 마지막 무대를 선보였다.
유족으로는 딸 김은희(63)씨와 손녀 김형진(40)씨가 있다. 아이돌그룹 2NE1의 춤꾼 공민지는 고인의 친정 증손녀다. 빈소는 전남 영광 농협장례식장, 발인은 12일 오전10시. (061)353-04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