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 금융

[김승웅 휴먼칼럼] 발칸반도가 불타는 이유

발칸반도가 연 2주째 불타고 있다. 불길을 따라 전황을 추적하다 보면 그곳 발칸 제국에 기를 쓰고 진격했던 10여년전의 취재 경쟁이 떠오른다. 88올림픽 직전으로, 당시 파리주재 한국 특파원들은 누가 먼저 동구권의 담을 넘느냐를 두고 피나는 경쟁을 벌이던 때였다. 동독과 폴란드, 헝가리, 체코의 담은 이미 넘은지 오래고 이제 남은 경쟁은 발칸 산맥에 걸친 몇몇 위성국가로 쏠렸다.지금 불길이 잡히지 않은 유고의 수도 베오그라드를 비롯해서 발칸 동쪽의 소피아(불가리아), 흡혈귀 드라큘라의 설화를 지닌 부쿠레슈티(루마니아)주위 를 맴돌았다. 소피아의 겨울은 무척 추웠다. 외양만 웅장하되 적막강산이던 그곳 국회의사당 안의 냉기가 특히 겨울 다웠다. 한 발이라도 인근도시에 가까이 가면 비자 받기가 쉬울 듯 싶어 발칸 남단의 아테네(그리스)와 동단의 이스탄불을 뻔질나게 찾던 기억도 새롭다. 여름 한철 그곳 에게 해와 반도 건너 아드리아 바다에서 마주 부는 해풍은 반도의 습기를 몽땅 날린다. 이상한 건 그 습기 가신 바람이 안겨주던 허망함이다. 상쾌해야 될 바람이 허망하게 느껴지던 이상한 곳이다. 유고의 한 촌락에서 만난 할머니는 집에서 만든 포도주라며 동양기자에게 술을 떠 주었다. 같은 동구권이지만 그 당시 이미 닳을 대로 닳아 빠진 중유럽도시 부다페스트(헝가리)의 여인들과는 다른 순박한 눈매였으나, 이상한 건 그 눈길에서도 예의 허망함이 느껴졌다는 점이다. 발칸은 한마디로 그런 곳이다. 그 허망함은 마치 결혼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합법적인 성생활」로 정의하는 사회학자의 답변을 들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틀린 대답은 아니되 얼마나 허망한 답변인가. 학문이란 원래 이런 건가. 사회학이란 그런건가. 같은 문맥에서 지금의 코소보 전쟁을 생각해 본다. 전쟁이란 무엇인가. 예의 합법적이라는 포맷으로 전쟁을 정의할 경우 그 대답은 「합법적인 살인」이 된다. 교전 당사자간에는 모든 살인이 정당화되는 것이다. 정당화될 뿐 아니라 장려되기까지 한다. 또 기계역시 합법성을 띤다. 지구상에 존재해 온 수천가지의 전쟁가운데 제대로 힘으로 이긴 것은 10%에 불과할 뿐 나머지 90%가 기계로 승패가 결정났다는 통계가 이를 반증한다. 한마디로 역설이다. 지금 코소보 상공에 자욱한 포연속에서 이런 허망과 역설의 냄새를 거듭 맡는다. 경위부터가 그러하다. 지난 80년 이 세상을 등질 때 유고 연방의 지도자 티토 대통령은 『내 사후 이 나라는 다섯 등분될 것이다』고 예언한 바있다. 그의 예언은 유언이기도 했다. 국제 무대를 주름잡던 비동맹 외교의 총수답게 그의 예언은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포착한 것이다.구소련의 붕괴를 10년전에 이미 예단한 것이다. 그 방대한 소련땅이 앞으로 15개의 국가로 쪼개지리라는 걸, 그럴 경우 5개 국가로 결합된 유고 연방 역시 분산되리라고 그는 확신했고 그후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등이 독립국으로 바뀌면서 티토의 예언은 사실로 입증됐다. 주민 200만 가운데 90%가 알바니아계인 지금의 코소보 주민 역시 독립토록 「헌법」으로 보장돼 있었다. 독립이 안될 경우 어느 정도 자치정부를 허용, 적당한 시기에 독립국가가 되거나 인접국가 알바니아와 합병토록 내락을 받아 놓은 상태였다. 이 유언은 그러나 지켜지지 않았다. 티토의 후계자로 자처하는 밀로세비치 현 대통령이 전임자의 유언을 깬 것이다. 유언을 깬 이유는 역시 허망하다. 그의 국내 지지기반이 약한데다 무엇보다도 국수주의적인 군부의 반발을 우려, 내전을 무기로 활용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밀로세비치는 미군과 나토군의 공습을 의도적으로 자초한 것이다. 또 이 전술은 일단 성공했다. 한 때 강경자세를 보이던 국내야권의 반발이 공습개시 이후 꼬리를 감춘 것이다. 이런 허망한 몸 놀림은 이번 공습의 주역인 클린턴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르윈스키 스캔들에서 헤어난지 6주가 채 못된 시점에서 그는 서둘러 코소보 개입을 단행한 것이다. 이번 개입이 미국의 국익에 얼마만큼 도움이 되리라는 계산 없이 무턱대고 뛰어든 것이다. 이번 공습이 아무런 사전 대안없이 내려진 결정이었다는 최근 미 국방부 수뇌부의 자공이 이를 입증한다. 세기 말에 왜 이런 허망한 일만 속출하는가. 잘못은 결국 국민에게 있는 걸까. 하늘이 불량한 지도자를 세움은 죄많은 국민을 정치하기 위해서라는 한 경전의구절을 역시 허망한 심정으로 되새겨 본다.<언론인·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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