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광고판에 한 국책은행이 이런 선전문구를 내걸고 있다.『우리 은행에 예금하시면 원금과 이자를 정부가 보장해 드립니다』 정부가 전액 출자한 은행이니 돈 떼일 염려가 없으리라는 고객들의 심리를 이용한 선전이다. IMF사태 이전에는 그래도 은행하면 예금자 입장에서 공신력 하나는 믿어줬던 터이고 보면 은행의 신뢰도가 그동안 얼마나 떨어졌는가를 역으로 드러내는 것 같다.사실 은행은 지난 2년 동안 빚잔치하는 집안 꼴이었다. 부실대출로 구멍이 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고 몰아닥친 시류의 흐름에 살길을 찾기 위해합병마저 불사할 정도였다. 간판마저 사라진 곳도 있다. 한판 큰 빚잔치로 끝이나면 좋겠지만 그리 간단치가 않다. 부실의 늪은 깊이를 알 수가 없다.
은행 공신력을 그래도 정부가 받쳐주고 있는 것은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공적자금을 풀어 부실대출을 떠 안아주지 않았다면 파산 속출의 대란이 벌어졌을 것이다. 은행쪽으로 보면 사회적 공신력에 대폭적인 적자가 나 정부신용을 차입해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꼴이다.
정부하면 매일 여론과 언론의 십자포화를 받고 있는 불신시대이지만 대내적 채무이행에서만은 트리플A란 건 묘한 현상이다. 금융기관 건지기에 들어가고 있는 수십조원의 공적자금을 마련할 수 있던 것도 그 덕이다. 정부는 믿을 게 못된다고 하면서 국가는 믿고 있는 것이다. 하기야 국가는 발권력이라는 최후의 보루를 장악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지금 한국경제의 복원력은 시장의 힘보다는 공적자금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 64조원이라는 규모도 그러하려니와 대우문제에서 드러났듯이 금융기관의 신용위기를 건질 길은 공적자금밖에 없다고들 본다.
수요가 커지면 자연 공급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공적자금 팽창의 잠재성이다. 일이 잘 풀려 공적자금을 만들어 낸 채권상환이 이루어지면 걱정할 필요가 없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예산팽창 압력과 국민의 세금부담 가중을 초래하게 된다.
자연 국가신용도 흔들리게 된다. 지하철의 그 은행 광고판도 바뀔지 모르겠다. 정부는 그런 거 다 알고 자금관리를 하겠다고 장담한다. 하지만 공적자금 규모만큼 커져가는 은행에 대한 영향력을 저울질하고 있는 정치가와 관료들이 쉽게 방향을 바꾸려 할까. 퇴장의 미학은 사람들의 얘기로만 탐구할 분야가 아닌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