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부양을 위한 정부와 여당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여권은 그동인 밀어붙이던 ‘개혁론’ 을 뒤로 미루고 ‘부양론’으로 선회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경기불황의 골이 그만큼 깊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고 ‘아니다’고만 하던 위기를 인식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당정간에는 경기부양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한목소리를 내면서도 관심은 경기부양의 툴(도구)을 어디서 찾느냐에 모아지고 있다. 이와 관련, 9일 열린우리당과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동시에 ‘재정 카드’ 를 언급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금리와 환율을 통한 정책이 딜레마에 빠진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선택 가능한 카드는 재정밖에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우리나라의 재정건전성이 선진국보다 훨씬 우수한 상황에서 균형재정의 도그마에 집착하다가 ‘경기도 살리지 못하고 재정도 잃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23% 수준으로 미국(63.4%)과 일본(154.6%) 등 경제협력개발기구(OECDㆍ평균 78.2%) 국가들에 비해 월등하다. 파이낸셜타임스의 아시아뉴스 편집자인 단 보글러도 이날 “한국정부에는 경기부양 의무가 지워지며 한국정부는 능력도 있다”고 말했다.
당정의 이런 의중은 여당이 이날 내놓은 ‘SOC 투자’와 ‘연구개발(R&D)투자’ 확대안에서도 그대로 묻어난다. 당초 당정은 올해 예산부터 앞으로 5개년까지 이 분야 예산투입을 대폭 줄이겠다고 결정했었다. 특히 SOC의 경우 예산처는 지난달 초 국가재정운용계획 시안을 발표하며 “이미 과감한 재정투자가 이뤄진 만큼 예산보다는 민자유치로 사업을 활성화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과거와 달리 정부 지출을 통한 도로ㆍ항만 등의 건설을 지양하고 사업의 수익성을 높여 민간자본을 대거 유치하겠다는 것. 하지만 이를 철회하고 다시 정부 재정투입을 강화하기로 한 것은 당장의 재정건전성보다 고용창출 등 부양을 이뤄낼 수 있는 방법이 SOC 이외에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내년 SOC 규모는 예상과 달리 올해(26조5,000억원)보다 소폭 늘려 책정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정부도 재정지출 확대를 통한 경기진작에 대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부총리는 이날 “국회에서 재정적자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다”며 “외부 연구용역을 통해서라도 실질적인 적자규모를 담은 총재정수지를 정확히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이 부총리가 ‘재정’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지시한 것은 이례적인 일로 추가적인 재정지출이 발생할 수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예산처는 이날 당초 이달 11일로 예정됐던 2005년 예산 관련 ‘당정청협의회’를 갑작스럽게 취소했다. 내년 예산편성에서 큰 변화가 생겼음을 짐작케 한다. 일부에서는 당정의 일련의 움직임에 대해 경기부양을 위한 ‘2차 추경편성의 예고판’으로 해석하고 있다. 당초 편성된 1차 추경안이 경기진작과는 상관없는 중소기업 및 소외계층 지원에 치우친데다 이미 올 상반기 재정지출 집행실적이 55%를 넘은 만큼 추가적인 예산편성 이외에는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경기부진으로 걷어들이는 돈이 쪼그라들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재원을 마련하느냐에 달려 있다. 방법은 하나, 적자국채 발행밖에 없다. 이미 올해 세수부족으로 2조5,000억여원 규모의 적자국채가 발행돼야 하는 만큼 정부로서는 재정확보 방안의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난제로 남아 있다. 지난해 2차 추경규모(3조원)를 감안할 때 기금 전용분 등을 고려하더라도 1조~2조원 규모의 국채를 추가로 발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김영기기자 young@sed.co.kr
현상경기자 hsk@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