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취리히 금융가에 위치한 크레디스위스은행 영업점 로비에는 증시 동향을 실시간으로 나타내는 커다란 입체 전광판이 설치돼 있다. 거래량이 많거나 관심을 끌고 있는 수십개 종목의 주가를 표시하는 빨간 전광 표시가 시시각각 숫자를 바꾸며 은행을 찾은 고객에게 증시 상황을 알려준다. 고유의 은행업무뿐 아니라 증권 등 모든 금융업을 겸하는 유니버셜 뱅킹(UNIVERSIAL BANKIG)의 전형적인 모습이다.유니버셜뱅킹은 한마디로 「은행의 겸업화」다. 은행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지주회사를 통해 증권이나 보험 등 다양한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백화점식 」 금융기관을 일컫는다. 금융권을 구분하는 규제가 사라지거나 완화된 유럽 금융기관들을 중심으로 유니버셜 뱅킹은 「대형화」와 함께 세계 금융산업의 또하나의 조류를 형성하고 있다.
유니버셜 뱅킹의 묘미는 은행과 고객 모두에게 득이 되는 「윈-윈게임」이라는 것. 은행은 다양한 상품을 연계시켜 판매함으로써 저비용·고효율을 실현시킬 수 있고, 고객 입장에서는 필요한 금융 정보와 모든 서비스를 거래은행에서 한꺼번에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편해진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전세계적으로 무수한 인수·합병을 거듭해 온 HSBC의 경우 업무 범위는 모든 금융 영역을 포괄한다. 상업 은행과 투자은행, 자금, 보험, 전자금융, 무역 서비스, 현금관리, 카드, 리스, 자산 서비스 등이 HSBC 그룹이 취급하는 주요 업무들. 투자은행 부문은 자문과 자산관리, 프라이빗 뱅킹 등으로 다시 나뉘기 때문에 이들 서비스를 제공하는 주요 그룹사만 수십개에 달한다.
이 모든 HSBC 그룹사들의 기능이 입체 그물망처럼 얽히면서 고객의 입맛에 맞는 금융서비스의 조합을 만들어낸다는 얘기다.
HSBC의 M J 쟈코비 고문은 『HSBC의 영업 전략은 신규 고객을 유치하는 것뿐 아니라 기존 고객들로부터 새로운 사업을 창출해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모기지 론이 있는 고객에게는 보험 상품을, 신용카드 거래고객에게는 저축성 예금상품을 파는 식이다. 백화점식으로 다양한 금융상품을 갖춰 놓은 유니버셜뱅크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HSBC처럼 무수한 자회사를 거느린 금융그룹이 아니더라도 국제적인 규모를 갖춘 유럽 은행들은 너도나도 유니버셜 뱅킹을 통한 종합 금융서비스 제공에 나서고 있다.
독일의 코메르츠방크나 도이체방크도 스스로를 「모든 목적을 충족시켜주는(ALL-PURPOSE) 은행」이라고 칭하는, 전형적인 유니버셜 뱅크에 속한다.
그러나 은행 업무가 한없이 다각화(多角化)되는 것은 아니다. 전문가들은 『그동안 유럽 은행산업을 특징지어온 유니버셜 뱅킹이 절정에 다다르면서, 일부에선 「전문화」로의 회귀가 이뤄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세계 최대의 유니버셜 뱅크인 도이치방크도 고객 서비스의 전문성을 강조, 스스로를 「멀티 스페셜리스트(MULTI-SPECIALIST)」로 규정짓는 「신개념」의 유니버셜 뱅크를 지향하고 있다.
도이체방크는 본부(CORPORATE CENTER)와 자산관리(ASSET MANAGEMENT), 커스터디 결제서비스(GLOBAL TECHNOLOGY AND SERVICES), 소매금융(RETAIL AND PRIVATE BANKING), 기업금융 및 부동산(CORPORATES AND REAL ESTATES), 국제 기업금융(GLOBAL CORPORATES AND INSTITUTIONS) 등 6개 조직의 결합으로 형성돼 있다.
여기에 최근 BTC와의 합병을 완료, M&A 알선 등의 투자은행 업무는 물론 자산관리, 국제 프라이빗 뱅킹 등 모든 업무에서 전문성과 역량을 대폭 강화할 수 있게 됐다고 은행측은 설명했다.
국제적인 유니버셜 뱅크라고 해서 세계 각지에서 마구자비로 일을 벌이지도 않는다. 도이체방크의 홍보담당 로널드 웨이처트 박사는 『도이체방크는 독일 내에서는 소매금융과 기업금융, 해외에서는 투자은행 업무와 기관 자산관리, 프라이빗뱅킹 업무에 주력한다는 방침』이라며 지역에 따라 핵심 역량을 달리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니버셜 뱅킹 국가」로 일컬어지는 스위스에서도 이같은 추세는 엿보인다.
크레디스위스그룹은 스위스 국내 소매금융만을 전담하는 크레디스위스 외에 국제적인 영업망을 갖춘 크레디스위스 프라이빗뱅킹 크레디스위스퍼스트보스톤(CSFB) 크레디스위스 자산관리 보험사인 윈터서(WINTERTHUR) 등 5개 사업단위로 구성돼 모든 금융분야에 발을 걸치고 있는 유니버셜 뱅크다.
그러나 크레디스위스그룹은 각 사업단위 조직이 중앙으로 집중되는 전형적인 유니버셜 뱅크 조직 형태에서 벗어나 최근 몇 년 동안 각 사업조직이 분화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때문에 크레디스위스그룹 직원들은 스스로의 조직을 『조금 변형된 유니버셜 뱅크』라고 지칭한다. 크레디스위스그룹의 연례보고서에도 「유니버셜 뱅크」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