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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원 행장은 2004년11월 국민은행장으로 취임하면서 자신의 좌우명인 “바라는 만큼 노력하자”라는 화두를 던졌다. 강 행장은 “오늘부터 여러분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은행의 구심점으로서 노력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강 행장은 직원들에게 세 가지 바라는 것을 제시했고, 이뤄냈다. 이를 통해 국민은행은 세 가지 고정관념을 깨트렸다. 강 행장의 첫 번째 던진 화두는 부실이 없는 ‘클린 뱅크(Clean Bank)’. 국민은행은 ‘덩치가 크면 부실채권도 많을 수 밖에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는 취임 후 직원들에게 자산건전성 강화에 집중할 것을 주문하면서 업계 최고 수준이던 부실채권 비율을 업계 최저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부실자산이 줄면서 충당금 부담은 급감하고, 이익은 급증했다. 2005년 금융회사 중에서 처음으로 당기순이익 ‘2조원 클럽’에 가입했고, 이후 3년 연속 2조원이 넘는 순익 행진을 이어가는 중이다. 두 번째 화두는 ‘고객이 많은 은행도 친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직원들은 “국민 2명 가운데 1명을 고객으로 갖고 있는 대형 은행이기 때문에 서비스가 안 좋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강 행장은 ‘고객만족 일등은행’ 달성을 핵심목표 중 하나로 제시하고 직원들에게 변화를 강조했다. 강도 높으면서도 꾸준한 추진력으로 고객 만족도 만년 꼴찌였던 국민은행이 ‘국가고객만족도 2년 연속 1위’ 은행의 자리에 올랐다. 세 번째 화두는 ‘고객이 많이 몰려도 대기 시간이 짧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고객이 몰리는 월말에 국민은행 창구를 찾은 고객들은 몇 십 분씩 기다리는 것을 당연시해야 했다. 하지만 강 행장은 지점 창구를 ▦입ㆍ출금 ▦분실ㆍ재발행 ▦신규상담 등 3개로 분리하는 선진국형 영업점 업무분리제도(SOD)를 도입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강 행장 취임 후 국민은행의 대외 신인도와 신용등급은 높아졌다. 2007년 S&P는 국민은행을 국가 신용등급과 같은 ‘A’로 평가했다. 같은 해 7월에는 무디스로부터 국가 신용등급보다 높은 ‘Aa3’를 받는 성과를 냈다. 강 행장은 늘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증기 기관차론’을 자주 내세운다. 2006년 2월 전국 영업점장이 모인 자리에서 “증기 기관차는 물이 수증기로 기화될 때 움직인다. 99도에서는 기관차가 움직이지 못하지만, 100도에서는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최후의 1도까지 최선을 다해 100도를 만들어 ‘국민은행’이라는 기관차가 질주하도록 해야 한다”고 독려했다. 그렇다고 서두르지 않는다. 2006년7월 전 직원들에게 “우리는 다 같이 큰 꿈을 꾸고 있다. 그러나 만만하지는 않다. 우리는 ‘호랑이의 눈으로 살피되, 황소의 발걸음으로 신중하고 끊임없이 길을 간다’는 호시우보(虎視牛步)의 자세가 필요하다. 치밀하고 지속적인 준비와 노력을 기울이며 한발한발 꾸준하게 전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올해부터 적용된 신BIS협약, 일명 바젤2에 대비해 지난해 말 국내 은행 중 처음으로 기본내부등급법 사용을 인증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미리 준비하고 노력한 결과다. 강 행장은 도전하는 CEO가 되고자 한다. 강 행장은 올 초 카자흐스탄 뱅크센터크레딧(BCC) 은행인수를 결정했다.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기 위해 우리나라 금융 역사상 가장 큰 해외투자자로 나선 것이다. “국민은행의 미래는 바로 우리 손 안에 있다. 언제나 미래는 변화와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한 자의 것이었다“는 그의 말처럼 도전을 통해 미래를 손안에 넣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 외환위기후 부실 서울은행 정리매각
경험·자신감으로 성과 일궈
강정원 국민은행장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두 가지 타이틀을 갖고 있다. '외국계 은행 출신으로는 최초의 국내 은행 최고경영자(CEO)'와 '정부가 외국 헤드헌팅 회사를 통해 뽑은 최초의 CEO'라는 것이다. 외국계 은행에서만 일했던 그가 국민은행장에 연임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서울은행장으로서 보여줬던 경영성과 때문이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옛 서울은행은 부실이 심해졌다. 정부는 공적자금을 수혈하고, 수 차례 매각 작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1996년 이후 4년 반 동안 행장이 4번이나 바뀌면서 서울은행은 표류했다. 2000년5월24일. 정부는 강 행장을 서울은행장으로 뽑았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서울은행 정상화와 매각작업. 그는 정부에게 두 가지를 요청했다. '완전 자율경영과 자본확충'. 그는 자신의 경험을 믿었고, 국제적인 전문가를 영입해 서울은행을 살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경영진 구성은 성공적인 구조조정의 핵심"이라고 판단하고, "마음이 맞고, 충분한 실력을 갖춘 경영진을 구축하는 것이 은행을 성공적으로 경영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확신했다. 강 행장은 서울은행을 '작지만 강한 클린 은행'으로 만들기 위해 해체작업을 단행했다. 이런 작업을 '오래된 진공관 라디오를 새로운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바꾸는 일'에 비유했다. 수행비서와 간부식당ㆍ전용 엘리베이터를 없애고 행장실을 줄이는 등 불필요한 요소를 없앴다. 은행을 소매금융ㆍ기업금융ㆍ신탁업무의 세 가지 분야로 나누고, 후선 조직은 다섯으로 분류했다. 신용관리 부서를 독립적이고 강한 조직으로 만들고, 감사를 시스템과 과정에 맞게 재조직하는 등 국제적인 베스트 프랙티스(Best Practice)를 이식시켰다. 2002년11월1일. 예금보험공사는 하나은행과 옛 서울은행 지분 100%를 매각하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강정원 행장은 기뻤다. 지난 2년 반 동안의 성공적인 구조조정 덕택에 정부가 마지막까지 유리한 입장에서 협상을 하면서 높은 가격을 받는 성과를 냈기 때문이다. 또 2년 반 전 '아무도 관심을 안 갖던 서울은행을 치열한 인수경쟁이 벌어지는 매력적인 투자대상으로 바꿔놓겠다'는 자신의 계획이 달성된 순간이자, 강정원 국민은행장이 잉태된 계기가 됐다. ■ 강정원 행장은
강 행장은 어릴 때부터 국제적인 감각을 키웠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초등학교는 일본에서 다녔다. 경기고등학교를 다니다 홍콩으로 옮겨 고등학교를 마쳤다. 학사와 석사학위는 미국에서 땄다. 외환은행 창립 멤버인 부친과 함께 전 세계를 돌며 글로벌 마인드를 쌓았다. 사회생활은 미국 씨티은행에서 시작했다. 씨티은행 서울지점에서 5년간 일하다가 뱅커스 트러스트로 옮겨 15년 동안 몸담았다. 1996년 6월 뱅커스 트러스트가 도이치뱅크를 인수하면서 도이치 뱅크 한국 대표를 지냈다. 20년 동안 외국계 은행에서 일하던 그는 외환위기로 부실이 심해진 한국 은행 살리기에 나섰다. 2000년 초 정부는 국내외 전문가 중 서울은행장을 찾았다. 정부가 원하던 인물은 자리에 관심이 없었고, 추천된 후보 중에는 마땅한 인재가 없었다. 정부가 도이치 뱅크가 자문계약을 맺고, 2차 은행장 물색에 나섰다. 강 행장은 자발적으로 후보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2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외국계 은행 출신 최초의 한국 은행 CEO가 됐다. 다양한 국제금융 경험과 글로벌 스탠다드 마인드가 정부를 움직인 것이다. '강정원식(式) 리더십'은 카리스마 보스형ㆍ권위주의적 제왕형 등으로 각인돼 있던 당시 은행장 모습을 외유 내강형ㆍ실무형으로 바꿔놓았다. 온화하고 합리적 성품으로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치밀한 업무처리와 공사가 분명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 경영원칙
▦편한 은행-고객중심 영업체제 ▦튼튼한 은행-지속적인 성장기반 강화 ▦지혜로운 은행-효율성 제고 ◇ 약력 ▦50년12월 서울 출생 ▦다트머트대학교(경제학 학사) ▦다후트대학교 플레쳐스쿨(국제법 및 외교학 석사) ▦씨티은행 뉴욕본사 ▦뱅커스 트러스트 한국 대표 ▦도이치 뱅크 한국대표 ▦서울은행장 ▦국민은행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