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6월16일] 폰 브라운

[오늘의 경제소사/6월16일] 폰 브라운 권홍우 편집위원 ‘런던 폭격, 달 착륙.’ 두 사건에는 동일인의 궤적이 묻어 있다. 폰 브라운(Werhner von Braun). 독일군의 비밀병기 V2로켓과 미국의 우주개발 기술을 주도한 인물이다. 1912년 부유한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일찌감치 달 여행을 소망으로 품었다. 아마추어 천문가였던 모친의 영향. 대학 신입생임에도 실력을 인정 받던 브라운은 19세 때부터 히틀러 군대의 비밀 프로젝트의 참여했다. 박사학위도 군의 지원으로 땄다. 1937년 나치당에 가입하고 친위대(SS) 간부 명단에도 오른 그는 1942년 A4로켓을 완성시켰다. 1944년부터 V2라는 이름으로 실전 배치된 그의 로켓 1,027기는 런던 폭격에 쓰였다. 오늘날 대륙간 탄도탄(ICBM)의 원형. 독일의 패전이 임박하자 그는 동료를 이끌고 미군에 투항했다. 나치 경력과 비밀공장에서의 포로노동자 학대가 문제됐지만 기술이 그를 살렸다. 1945년 117명의 과학자와 함께 미국행. 화차 300량 분의 V2로켓과 부품ㆍ기자재도 함께 대서양을 건넜다. 뉴멕시코의 비밀기지에서 일하던 그에게는 최상의 연구환경이 제공됐다. 1947년(35세)에는 열일곱 살 어린 이종사촌과 결혼, 포로의 신분으로 가정까지 꾸렸다. 1950년 미국 시민권 취득. 브라운이 각광받은 배경은 우주개발 경쟁. 소련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가 발사된 지 넉 달 만에 쏘아올린 익스플로러와 아폴로 우주선의 발사용 로켓이 그의 작품이다. 유명세를 탄 그는 미 항공우주국(NASA)의 부책임자까지 지냈다. 공직 은퇴 후 민간항공제작사의 부사장으로 일하다 1977년 6월16일 암으로 몰(歿). 2차대전과 냉전의 한복판, 전력 시비에서도 그는 65년 평생을 풍요롭게 보냈다. 기술 덕분이다. 유기무죄(有技無罪). 입력시간 : 2006/06/15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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