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침체와 맞물리는 물가상승. 최근 한국경제의 양태는 스태그플레이션(저성장ㆍ고물가)의 초입단계에 들어서고 있다는 관측을 낳게 할 정도로 비관적 색채로 가득 차 있다. 모건스탠리가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을 제기한 데 이어 민간 전문가들도 줄줄이 경고하고 나서는 상황이다.
정부는 여전히 부인하고 있지만 각종 경제지표는 우리 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질 가능성을 충분히 암시하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경기흐름을 보여주는 전 분기 대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지난 1ㆍ4분기 3.2%에서 2ㆍ4분기에는 2.4% 정도로 급락할 것으로 예상됐다. 반면 6월 중 생활물가 상승률은 6.8%까지 올랐다.
중장기 전망도 암울하다. 정부는 연말이면 회복될 것이라고 강조하지만 비상구를 찾기 힘든 게 현실이다. KDI는 4ㆍ4분기 성장률이 4.2%까지 떨어질 것으로 예고한 바 있다. 내년 경기전망은 더욱 비관적이다. 예측기관들의 전망을 종합하면 내년 성장률은 5%대의 잠재성장률을 훨씬 밑도는 4%대에 그칠 전망이다. 한국은행은 성장률이 올해 5.2%에서 내년에는 4.8%로 떨어질 것이라고 비공식적으로 전망하고 있다. 외국계 증권사는 기껏해야 4% 초반의 성장률을 점치고 있으며 모건스탠리는 아예 3.8%까지 내려 잡았다.
이 같은 전망도 낙관적일 수 있다. 계속되는 투자부진은 성장잠재력을 급속하게 갉아먹고 있다. KDI에 따르면 5%대의 잠재성장률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총투자증가율이 6.5%가 돼야 하는데 지난해 3.6%에 이어 올해에도 3.9%에 그칠 전망이다. 여기에 내년 주력산업이 고전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수출마저 비상등이 켜졌다. 주력 수출품목인 반도체와 액정표시장치(LCD)ㆍ휴대폰 등의 가격이 떨어지고 있는 것. 삼성전자의 휴대폰 등 정보통신 부문의 영업이익은 2ㆍ4분기 중 38%나 떨어졌다.
문제는 이 같은 불황국면이 물가상승과 동반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허찬국 한국경제연구원 거시경제연구센터 소장은 “경제운용의 가장 큰 변수는 유가이며 유가 상승세가 연말까지 지속될 경우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불행하게도 유가가 조기 안정될 것이란 전망은 그리 많지 않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지난해 평균 31.12달러에 머물렀던 서부텍사스산중질유(WTI) 가격이 올해 3ㆍ4분기 이후에도 배럴당 36달러이상에서 고공행진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수입물량 대부분을 차지하는 두바이유도 30달러 초반 아래로는 떨어지기 힘들 전망이다.
물론 현재의 ‘저성장ㆍ고물가’ 현상은 전형적인 스태그플레이션의 모습과는 다소 차이를 지닌다는 지적도 있다. 1차 오일쇼크가 났던 73~74년 당시 국제유가는 1년 만에 3.0달러에서 11.7달러로 폭등했고 성장률은 74년 1ㆍ4분기 12.5%에서 그해 3ㆍ4분기 4.6%로 곤두박질쳤다. 정부가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이 없다고 일축하는 것도 당시 지표와 비교하면 타당성을 지닌다.
하지만 이헌재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의 표현처럼 경제주체들이 우울증과 무기력증에 빠져 있다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LG경제연구원의 한 연구위원은 “70년대는 경제주체들이 ‘하면 된다’는 식의 왕성한 의욕을 갖고 있었다”며 기업을 비롯한 경제주체들의 비관론을 가장 무서운 적으로 손꼽았다. 정문건 삼성경제연구소 전무는 “재정과 통화정책이 한계상황에 처해 있으며 전형적인 ‘유동성 함정’의 형국”이라며 “스태그플레이션보다 오히려 장기침체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현 상황에서는 다른 정책적 도구보다 대기업이 돈을 쓸 수 있도록 각종 규제를 조기에 혁파하는 게 시급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