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토요산책] 떠남과 머무름

몇 년 동안 아침마다 같은 길을 따라 출근하다 보니 이제 어떤 풍경도 그다지 새롭지 않다. 하지만 나는 아침에 도심 거리 풍경을 완상하는 재미로 살고 있다고 해도 될 정도로 차창 밖의 풍경을 즐겨 바라보고는 한다. 인상적으로 내 눈에 밟히는 바깥 풍경은 다음 두 가지다. 먼저 서울 을지로입구 전철역 근처의 분식집 모습이다. 잠시 차가 횡단보도 앞에 정차한 사이 나는 어김없이 그곳으로 눈길을 보낸다. 직장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식당을 빼곡히 메우고 있고 미처 들어가지 못한 사람은 밖에서 먼저 들어간 사람의 식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서 있다. 그 풍경은 매번 봐왔는데도 결코 질리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 순간마다 먹고사는 일의 고단함과 특히 먹는다는 행위의 눈물겨움에 대해 다시금 숙고하게 된다. 비록 더운 밥은 아니더라도 식빵 한 조각, 또는 라면으로라도 간단히 요기를 하고 직장에 가려는 사람의 순한 눈길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뭉클해진다. ‘먹는다는 것’은 먹을거리가 풍족해진 지금도 언제나 큰 문제다. 먹으려고 일한다는 말이 진부해지지 않는 것은 삶을 구성하는 의식주 가운데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이 먹는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삶에서 밥상을 앞에 놓고 아침저녁으로 가족이 서로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큰 행복이다. 식구라는 말은 함께 식사를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던가. 음식점이 있는 거리를 좌회전하면 곧 시청이 나오고 왼편으로 대형 호텔들이 보인다. 그 호텔 앞을 지나치다 보면 두번째로 나의 시선을 그러잡는 풍경이 보이는데 바로 일군의 외국인이 여장을 꾸린 모습으로 시내구경을 하기 위해 서성이고 있는 모습이다. 그 순간 불현듯 나 자신이 여행을 떠났을 때의 모습이 떠오르고는 한다. 낯선 여행지의 도심에서 나도 때때로 출근 중인 사람과 마주치고는 했다. 러시아워의 풍경, 사람 사는 모습은 지구촌 어디나 별로 다르지 않다. 비단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를 떠올리지 않더라고 인간의 주거와 관련한 삶의 형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한자리에 정착해서 살아가는 정주민의 삶이 있고 다른 하나는 먹을 것과 일을 찾아 끊임없이 이주해서 사는 유목민의 삶이 있다. 좁은 의미로 문화는 정주민의 삶이 축적된 것을 말한다. 우리는 누구나 공간과 시간에 매여 있다. 일단 시간은 괄호로 묶어두고 자신이 매인 공간을 한번 둘러볼 일이다. 모든 정주민은 탈주의 꿈을 꾼다. 이 현실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는 욕망은 절반은 유목민적 삶의 유전자를 지닌 우리 모든 인간의 바람이다. 현실의 두터운 벽을 뚫고 변화한 환경, 다른 환경에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는 욕망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래서 나 또한 낯선 관광객을 볼 때면 가슴이 벅차온다. ‘아, 떠나고 싶다.’ 그런 생각 때문에…. 그런데 이 순간 나는 왜 떠나지 못하는가. 유목민의 삶의 형태는 강자만이 선택할 수 있다. 떠나는 순간 모든 변화하는 상황에 맞춰야 하고 또 작은 익숙해짐도 곧 새로운 도전으로 바뀌게 되니까. 물론 유목민의 삶에도 내가 미처 모르는 어떤 한계가 있을 테지만 지금은 소시민으로서 하루하루 과업이 있는 일터에서 행복을 꾸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다행스러운 사실은 내가 꿈꾸는 일탈을 책을 만드는 과업으로 대신하고 있다는 점이다. 책에는 헌 것, 묵은 것이 없다. 책은 늘 새롭게 조금씩 진화한다. 인생의 떠남과 머무름이 끝없이 갈린 길 위에서 나는 아침 출근길에 또 이 거리를 지날 것이고, 주린 배를 채울 직장인과 낯선 곳을 두리번거리는 관광객을 볼 것이고, 설렘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며 일터로 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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