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브레인웨어를 키우자] 4.학교가 변해야 나라가 산다

대학은 교육기관이다. 산업, 나아가 사회 변화를 수용하고, 주도할 수 있는 인력을 길러내야 한다. 기업이 대학, 특히 이공계 대학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는 것도 이런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박재민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연구위원은 “과거에는 기업 입장에서 이공계 인력을 충분히 확보하기 어려워 교육의 질에 대한 불만을 표시할 형편이 못 됐지만 이제는 성장 둔화로 인력 수요도 줄어든 데다 글로벌 경쟁으로 기업의 눈높이가 높아지면서 대학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연구와 교육은 대학의 존재이유다. 하지만 국내 대학에서는 교육보다는 연구가 우선시된다. 특히 대학 및 교수 평가 및 지원이 국제 과학기술 논문 색인지인 SCI(Science Citation Index)를 바탕으로 이뤄지다 보니 교수들은 SCI에 등재할 논문을 작성하는 것을 우선시한다. 그래서 서울공대를 비롯한 주요 공대 교수의 국제적인 논문발표실적은 꾸준히 늘고 있다. 김창경 한양대 신소재공학부 교수는 “정부가 두뇌한국(BK) 21 사업 등을 통해 연구를 강조하다 보니 대학도 교육보다는 연구실적을 중시하게 된다”고 말했다. 현재와 같이 교육의 질적 개선을 외면하다 보면 중장기적으로는 연구의 질도 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으로 지적된다. 민동준 연세대 공대교수는 “논문 가운데 가장 질이 떨어지는 논문이 바로 실험만을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라며 “수학 등 기초과학과 전공실력이 뛰어나지 않으면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는 연구성과도 기대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공대 교육과정 및 정원 탄력적으로 바뀌어야=미국도 지난 80년대 이공계 기피현상으로 한동안 몸살을 앓았다. 100명이 입학하면 불과 50명이 졸업할 정도로 학생들의 이공계 대학에 대한 기피 현상이 심각했다. 미국 공과대학들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대대적인 변신에 박차를 가했다. MIT의 경우 `MIT 졸업자를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로 만들자`는 목표아래 학생들의 종합적인 문제해결 능력을 키우는데 주력했다. 이런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MIT 기계공학과의 경우 산업변화에 발맞춰 교과과정에 정보기술(IT)이나 생명공학을 접목시켜 미국, 나아가 세계 최고의 기계공학과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국내 이공계 대학에서는 산업현장의 변화에 발맞춰 교육과정이 탄력적으로 조정되지 못할 뿐 아니라 학과별 정원은 철옹성처럼 바뀌지 않는다. 현재 이공계 졸업자 가운데 무려 40%가 실업자로 놀고 있는 반면 정보기술(IT) 분야에서는 인력 부족으로 아우성이다. 손욱 삼성인력개발원장은 “현재 미국 공과대학의 경우 IT 관련 정원의 비중이 40%에 달한다”면서 “국내 이공계 대학도 산업 수요 변화에 맞춰 정원과 교육과정을 탄력적으로 조정해 새로운 성장산업에 필요한 인력을 제 때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국책연구기관 관계자는 “원로 교수의 전공과목이 현재의 기술 또는 산업흐름과 동떨어져도 그 과목을 계속 가르치는 것이 국내 대학의 현실”이라며 “교수사회의 권력구조가 교육의 질적 개선을 가로막는 가장 큰 적(敵)”이라고 지적했다. ◇교수 평가 다원화해야=이공계 교육의 질을 높여 보다 우수한 과학기술인력을 양성하려면 교수 및 대학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필요한 것으로 지적된다. 지금은 오로지 SCI 등재 논문을 기준으로 교수 및 대학을 평가한다. 물론 지금도 교육에 대한 평가는 이뤄진다. 하지만 이런 교육 평가는 철저하게 정량적인 평가다. 그저 수업시간을 채우기만 하면 된다. 몸으로 때우면 되기 때문에 굳이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일 필요도 없다. 더욱이 학생 수가 최근 10여년사이에 크게 늘어나다 보니 교수들은 학부생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기도 어렵다. 이에 따라 교육, 연구, 산업계에 대한 지원 등 다양한 항목을 통해 교수를 평가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로 지적된다. 아예 강의 또는 중소기업에 대한 기술자문 등에만 전념하는 교수도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국책연구기관 관계자는 “학생들의 취업률, 연구를 통한 특허취득, 기업에 대한 기술자문을 통한 지역경제 기여도 등 다양한 잣대를 동원해 교수 및 학교를 평가해야 한다”면서 “이렇게 다양한 평가기준을 마련해 시행할 경우 대학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연구, 강의, 산학협력 등으로 역할 분담이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교수 평가, SCI 전적의존 탈피를 `SCI(Scinece Citation Index)` 국내 이공계 대학교수들은 자다가도 SCI라는 말만 들어도 벌떡 일어선다. SCI란 과학기술논문 데이터베이스에 등재된 학술지 등에 대한 검색에 이용되는 색인을 말한다. 국내에서는 주로 SCI에 나와 있는 학술지를 비롯한 각종 저널에 기고된 논문수를 기준으로 교수를 평가한다. 정부가 특정 프로젝트에 대한 참여 대상을 선정 할 때 `SIC 등재 논문 5편 이상`등으로 자격요건을 제한하기도 한다. 따라서 SCI는 이공계 대학이나 교수를 평가하는 거의 유일한 잣대나 다름없다. 사실 SCI에 등재될 정도면 상당한 수준을 갖춘 논문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SCI만을 교수 및 학교 평가를 위한 유일한 잣대로 삼는 것은 문제가 많은 것으로 지적된다. 교수들이 SCI에 등재될 수 있는 논문 작성에만 매달리는 나머지 학생들의 교육은 뒷전으로 밀린다는 비난이 많다. 익명을 요구한 이공계교수는 “SCI에 등재된 논문 수를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그저 대학의 서열을 매기는데 가장 편리한 방법이기 때문”이라며 “대학 및 교수 평가를 전적으로 SCI에 의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이공계 대학 위기 심각 구조조정등 변신 시급 대학이 죽어가고 있다. 출산율 저하에 따른 학령 인구 감소로 학생이 줄어들자 대학도 이제 구조조정에 들어가야 살 수 있는 시대를 맞고 있다. 교육인적자원부에 따르면 올해 전국의 189개 4년제 대학의 입학정원은 지난해보다 3,000명 가까이 줄었다. 입학정원이 줄어든 것은 사상 최초다. 지방대를 중심으로 지원하는 학생이 줄어들자 고육지책으로 정원을 축소한 것이다. 이공계 대학의 위기는 더욱 심각하다. 지난 80년대 후반부터 대학, 특히 지방대들이 이공계를 중심으로 무차별적인 정원 확대 경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정원을 늘리면서도 교육의 질을 높이려는 노력은 게을리 한 탓에 재앙을 자초한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아직도 공대 교육을 개선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학생을 더 유치할 지에 관심을 쏟는 게 현실이다. 국책연구기관 관계자는 “중장기적으로 국내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공대는 기껏해야 20개 정도일 것”이라며 “대학이 스스로 구조조정과 교육개선 노력을 기울이기 보다는 노동시장의 압력에 밀려 `서서히 죽는 길`을 택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이공계 대학 구조조정 절실=무차별적인 공대 정원 확대는 학부제와 함께 공대 교육의 질을 떨어뜨리는 주범으로 지적된다. 정부는 80년대 후반부터 이공계 정원 확대를 전제로 법대 등 다른 단과대학의 정원을 늘릴 수 있도록 허용했다. 대부분의 대학이 운영재원을 주로 등록금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이공계 정원 증원을 통해 조성된 자금이 공대교육을 위해 쓰여지는데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한송엽 서울공대 교수는 “현재 인문계 대학의 경우 학생과 교수의 비율이 25~30:1인 반면 이공계는 보통 40:1에 달한다”면서 “국내 대학이 재원의 대부분을 등록금에 의존하기 때문에 이공계 대학생들의 등록금을 인문계 대학생들을 위해 지원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고 말했다. 강성호 동신대 공대학장은 “과거에는 고등학교의 자연계와 인문계 비율이 7:3 이었지만 지금은 3:7로 역전됐다”면서 “당장 전체 정원을 줄이는 것이 어렵다면 이공계 대학의 정원을 줄이되 인문계의 정원을 늘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자율권과 경쟁을 동시에 강화해야=국내 이공계 대학의 구조조정이 진행된다고 해도 당분간 수도권 소재 명문 공대는 변화의 사각지대에 남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일단 대학 진학 인구가 크게 줄어든다고 해도 일차적인 타격을 받는 곳은 지방대학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대학진학자 숫자가 줄어든다 해도 이른바 명문대학에 대한 수요는 여전히 공급을 훨씬 웃돌기 때문에 자발적인 변화의 필요성이 그만큼 낮다고 할 수 있다. 국책연구기관 관계자는 “서울대, 연대, 고대, 한양대 등 주요 공과대학들은 변화에 대한 필요성을 아직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서 “수능시험 성적 등으로 고착화된 순위에 안주할 경우 현재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이공계 분야에서 국제적인 수준의 인력을 키우려면 `자율과 경쟁`은 필수적인 것으로 지적된다. 현행 교육제도로는 학생 선발이나 교과과정 운영에 이르기까지 대학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익명을 요구한 이공계 교수는 “수능시험과 내신등급 등으로 획일화된 학생 선발 잣대가 대학의 서열화를 고착화시키면서 학생들의 자긍심에 상처를 준다”면서 “자긍심이 금이 가면 교육에 대한 자발성이 상실될 수 있기 때문에 현행 입시제도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학생 선발 및 교과과정 등에 대해 대학이 자율권을 확대할 경우 교육의 다양성이 보장되고, 나아가 대학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교육의 질이 높아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서울경제신문ㆍ산업기술재단 공동기획 <특별취재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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