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에 대응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태도와 해법에 미묘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법과 원칙에 따른 수사를 강조하고 정치적 논쟁에는 침묵을 고수하던 기존 입장에서 벗어나 철저한 진상조사와 재발방지책 마련,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역설하며 한층 적극적이고 세부적인 해법까지 제시하고 나선 것이다.
야당이 줄기차게 요구해온 대국민 사과에는 응하지 않는 대신 국정원 댓글 사건에 대해 더 이상 수세에 몰리지 않고 주도권을 확보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한달 만에 주재한 31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박 대통령은 작심한 듯 현안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박 대통령은 “사법부의 독립과 판단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바로 세우는 데 매우 중요하다”면서 “사법부의 판단을 정치권이 미리 재단하고 정치적인 의도로 끌고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언급했다. 진상조사는 철저히 하되 대통령 자신은 이 같은 논쟁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전달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같은 태도 변화는 10ㆍ30 재보선에서 새누리당이 완승을 거두는 등 민심이 야당의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주장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박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내용과 강도 면에서 이전보다 한발 더 나아간 것으로 볼 수 있다”면서 “현안에 대해 자신감과 추진력을 확보한 만큼 ‘정치는 국회, 청와대는 국정’이라는 프레임을 그대로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국정원 사건에 대해 철저한 수사, 책임추궁, 재발방지 등 3대 원칙을 제시하면서도 야당이 요구해온 대국민사과를 하지 않은 것은 야당도 더 이상 정치논리에만 함몰되지 말고 경제활성화와 민생안정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 박 대통령은 이날 회의에서 전반부에는 국정원 사건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고 후반부에는 민생법안 처리, 민생경제 살리기 등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박 대통령은 야당을 직접 거론하지 않고 국무위원들이 민생법안 통과를 위해 여야의 협조를 얻어야 한다고 표현했지만 법안 통과에 야당이 적극 나서야 한다는 뉘앙스를 담았다.
박 대통령은 “거시지표의 회복세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국민이 느끼는 체감경기가 크게 나아지지 않고 있다”면서 “(민생)법안 처리 과정에서 각 수석과 국무위원이 적극 협력해 여야의 관련 법안을 소상히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노력에 최선을 다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또 “민생경제가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상황인 만큼 정책의 최우선을 체감경기 개선에 두고 경기회복의 온기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미칠 수 있도록 각별히 노력해주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박 대통령은 원전 비리에 대해 “확실하게 원전 비리부터 본때 있게 한번 뿌리뽑았으면 한다”면서 “원전비리는 국민의 분노를 자아내고 그렇게 오랜 기간 진행돼왔는데도 어떤 조치도 없이 이렇게 됐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한편 민주당 등 야권은 박 대통령의 국정원 사태 언급에 대해 “동문서답”이라고 비판하며 박 대통령에게 먼저 국민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배재정 민주당 대변인은 이날 서면브리핑에서 “국정원의 불법 대선 개입과 군 사이버사령부, 국가보훈처, 고용노동부의 선거 개입이 모두 과거 일인가”라고 반문한 뒤 “법과 원칙을 이야기하며 검찰총장ㆍ수사팀장 찍어내며 수사 방해한 것은 누구인가”라고 박 대통령 책임론을 거듭 제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