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한중일 바둑 영웅전] 마음을 비웠다

박지은에게 패한 다음날. 조훈현은 한국기원 기전부의 직원을 만난자리에서 정색을 하고 말했다. "우리 집 주소 잘 알지? 연락 좀 잘 해줘." "무슨 말씀이시죠?" "이젠 예선 대국을 많이 하게 생겼잖아. 열심히 대국을 해야 먹고 살지." 때마침 그 옆을 지나가던 고재희 7단이 말참견을 했다. "왜 그래? 쌀 떨어졌다고 마누라한테 바가지라도 긁혔나?" "곧 그렇게 될지도 몰라요." "예선이라도 열심히 두어야겠군. 도전기보다 마음도 가볍고 좋지뭐." "천만에요. 요샌 저단진이 어찌나 세어졌는지 예선이 본선이나 도전기보다 더 두기가 어려워요." 2000년 5월 31일. TV아시아 결승에서 조훈현은 이창호를 꺾고 우승컵을 차 지했다. 우승상금은 일화 2백 50만엔. 뒤이어 후지쯔배가 열렸다. 조훈현은 대만의 저우쥔신 9단, 일본 대표로 나온 조치훈, 중국의 저우허양을 제 치고 4강에 올랐다. 준결승에서 목진석을 꺾은 그는 중국의 강호 칭하오 9단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지금 소개하는 이 바둑이 그것이다. 칭하오와의 역대 전적은 3승 3패. 이미 중국의 랭킹 1위로 떠오른 창하오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대국 전날 일본 기자들이 조훈현을 둘러싸고 물었다. "6년 전에도 한번 우승하셨는데 그때와 지금 무엇이 다른가요?" "그때는 자신감이 너쳤는데 지금은 그저 겨우 한판씩 이기며 힘들게 나가고 있습니다. 마음을 비웠습니다." /노승일·바둑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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