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준비제도(Fedㆍ연준)의 출구전략이 늦어지고 유럽중앙은행(ECB)마저 기준금리를 깜짝 인하하자 새로운 글로벌 환율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ㆍ체코 등 상대적으로 펀더멘털이 탄탄한 신흥국과 호주ㆍ뉴질랜드 등 일부 선진국의 경우 통화절상 압력을 억누르기 위해 외환시장 개입, 금리인하 등의 조치를 단행하고 있다.
반면 올 8~9월 연준의 양적완화 축소 가능성으로 금융위기 조짐을 보였던 브라질ㆍ인도네시아 등 중남미ㆍ동남아 국가는 통화가치 제고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지지부진한 글로벌 경기 회복세와 각국의 보호무역주의, 연준의 출구전략 시기 논란과 맞물린 외국인 자본의 신흥국 이탈 우려 등이 뒤엉켜 환율전쟁 양상도 한층 복잡하게 흘러가고 있는 셈이다.
글로벌 환율전쟁 2라운드는 ECB가 촉발했다. 연준이 내년 3월에나 양적완화 축소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에 달러가 약세를 보이자 ECB는 지난 7일(현지시간) 시장의 예상을 깨고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전격 인하했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는 "환율은 ECB의 정책목표가 아니다"라면서도 "환율은 경제성장에 중요하기 때문에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금리인하 조치가 환율방어용이라는 점을 시사한 것이다. 실제 올 들어 달러 대비 7.2%나 올랐던 유로화 가치는 이날 1.6% 급락하며 2년 만에 최대 낙폭을 기록했다.
자국 통화가치가 급등하자 외환시장에 개입하는 국가도 속출하고 있다. 체코 중앙은행이 ECB의 금리인하 조치 발표 직후 11년 만에 처음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한 것이 단적인 사례다. 이날 유로화 대비 체코 코루나 가치는 4.4% 하락했다.
또 뉴질랜드 중앙은행은 부동산시장이 과열되고 있는데도 환율방어를 위해 금리인상 시기를 늦추겠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호주 중앙은행 역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구매력 지표를 기준으로 할 때 통화가치가 미 달러화에 비해 27%나 고평가돼 있다"고 밝히는 등 구두개입에 나섰다.
페루는 통화절상으로 자국의 원자재 수출의존형 경제가 타격을 받자 고육지책으로 4일 4년 만에 처음으로 대출금리를 인하했다. 뉴욕 멜론은행의 닐 멜러 외환전략가는 "기도 만테가 브라질 재무장관이 2010년 환율전쟁을 경고한 후 또다시 통화전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환율전쟁은 당분간 더 격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미국ㆍ유럽 등 글로벌 경기 회복세가 기대에 못 미치면서 수출경쟁력 확보를 위해 환율절하 필요성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국제통화기금(IMF)은 7월에 각각 3.1%, 3.8%로 제시했던 올해와 내년 세계 성장률 전망치를 불과 석달 만에 각각 2.9%, 3.6%로 하향 조정했다. 또 선진국 인플레이션도 대부분 목표치인 2%를 크게 밑돌 것으로 내다봤다. 블룸버그는 "선진국은 양적완화 기조를 이루기 어렵고 신흥국의 통화방어도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전망했다.
다만 이 와중에 환율절상을 유도하는 신흥국도 속출하고 있다. 내년 초 연준의 출구전략 논의가 본격화할 경우 외국인 자금이 이탈하며 금융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실제 8일 브라질 중앙은행은 달러 수요를 줄여 헤알화 가치하락을 저지하기 위해 14일부터 통화스와프 발행을 통한 시장개입에 나설 예정이라고 밝혔다.
브라질 헤알화 가치는 지난주에만도 달러 대비 3.7% 하락하며 11일 현재 1년 전보다 11.76%나 떨어진 상태다. 또 아르헨티나 페소화나 칠레 페소화 가치가 1년 전보다 각각 17.61%, 7.62% 급락하는 등 대다수 중남미 국가도 비슷한 처지이다. 또 9월 연준이 시장의 예상을 깨고 양적완화 규모를 현행대로 유지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잠시 안정세를 보였던 동남아 통화들도 최근 불안한 조짐을 나타내고 있다. 미국의 9월 고용지표 발표 직후인 지난달 23일 이후 인도네시아 루피아화는 달러 대비 6.7%, 인도 루피화는 3.2%, 필리핀 페소화도 1.4% 각각 급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