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가계소비를 견인해온 고령 연금자들이 가파른 엔저가 초래한 생활물가 부담 때문에 지갑을 닫기 시작했다. 엔저로 경기가 살아나면 임금이 오를 것이라는 기대가 있는 젊은 세대와 달리 소득 없이 가계를 꾸리는 고령자들에게는 엔저가 물가상승을 일으켜 생계비를 갉아먹는 악재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달러당 120엔대로 진입한 가파른 엔저가 일본 소비의 40%를 차지하는 고령층의 소비심리를 위축시켜 디플레이션 탈출의 발목을 잡는 부메랑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미 경제매체 CNBC는 9일(현지시간) 엔화 약세가 초래하는 물가상승이 일본의 고령 연금수급자들의 생계비를 압박하면서 소비를 위축시키고 있다고 전했다. 디플레이션 경제에서 두둑한 연금으로 여유 있는 생활을 누리며 일본 가계소비를 견인해온 고령층이 엔저로 직격타를 맞아 오히려 소비회복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닛세이기초연구소에 따르면 일본 시니어 세대는 소비의 40%를 차지하는 주력 소비층이다.
엔화 가치는 최근 미국에서 경기회복에 따른 기준금리 조기 인상 관측이 제기되며 빠르게 하락해 10일 도쿄외환시장에서 장중 한때 달러당 122.04엔을 기록하며 지난 2007년 7월20일 이후 7년8개월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 영국계 HSBC은행은 올해 말까지 엔화 가치가 달러당 128엔, 내년 말에는 130엔까지 추가 하락할 것으로 내다봤다.
가파른 통화 약세로 일본의 식료품 가격은 연일 고공행진을 하고 있다. 올 들어 1월에는 즉석면과 식용유, 2월에는 냉동식품과 즉석요리·커피값이 올랐고 이달 이후에도 유제품과 조미료 가격의 줄인상이 예고돼 있다. 유가 하락으로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주춤한 반면 생활에 필요한 물품 가격은 빠르게 오르고 있는 셈이다.
게이오대 경영대학원의 오바타 세키 부교수는 "평균적인 일본인들은 엔화 약세로 고통을 겪고 있다"며 "특히 소득이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 없는 연금수급자들이 물가 상승의 최대 피해자"라고 지적했다.
다이이치생명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근로소득이 없는 가계의 37.8%는 소비지출을 1.5% 줄였다. 이들 대부분은 60세 이상의 고령 세대다. 이 연구소의 구마노 히데오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고령자의 소비를 되살리는 길은 고령자를 겨냥한 재정지출을 늘리는 것뿐인데 일본 정부는 이미 막대한 재정적자에 시달리고 있다"며 "이는 구조적으로 풀 수 없는 문제"라고 평가했다.
일본 정부도 고령층의 소비위축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마이니치신문은 일본은행 정책분석으로 유명한 도쿄단시리서치의 가토 이즈루 수석 이코노미스트를 인용해 "일본은행이 고령자의 소비심리 악화를 우려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내각부가 발표하는 소비자태도지수도 60세 이상 연령층의 소비심리가 아베노믹스 도입 당시보다 나빠진 상태라고 신문은 덧붙였다.
가토 이코노미스트는 "돈을 대량으로 푸는 일본은행의 통화정책하에서 수혜자는 수출기업을 중심으로 임금이 오르는 젊은 직장인들"이라며 "고령층은 엔저에 따른 생활비 부담 증가라는 악영향에만 노출된다"며 "리플레이션(통화팽창) 정책이 길어질수록 고령자 소비심리는 악화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