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시내에서 자동차로 20분쯤 달려가면 세계적 금융사인 ING그룹 본사건물이 나온다. 지난 11일 찾은 이곳은 평일인데도 여기저기에 빈자리가 적잖이 눈에 띄었다. ING는 직원들이 주중에도 가족들과 함께 보낼 수 있도록 자유롭게 휴무일을 정해 쉴 수 있는 탄력적인 근무시간을 도입했다고 한다. 커뮤니케이션 업무를 맡고 있는 빅토리나 드 보어씨는 “주중 휴무일에는 직원들이 자녀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기 때문에 우리는 ‘파파데이(Papa Day)’ 또는 ‘마마데이(Mama Day)’라고 부른다”면서 활짝 웃었다. 이곳 본사 직원 가운데 65% 정도는 주당 32시간, 즉 나흘만 일하는 시간제 근로자(비정규직)다. 보어씨는 “가정과 직장 생활 모두 만족스러워야 보다 생산적이지 않겠냐”며 “대부분의 직원들이 이 같은 근무 시스템을 선호한다”고 전했다. 우리로서는 그저 꿈 같기만 한 그들의 직장생활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바로 노와 사ㆍ정부가 뜻을 모아 ‘사회 대타협’을 이뤄내고 이를 통해 경제성장, 특히 고용창출에서 괄목한 만한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서울경제 취재진이 네덜란드 등 북유럽 현지에서 만난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일자리를 원한다면 기존 정규직들은 임금 문제를 양보하고 이에 대한 사용자와 정부 측의 화답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청년층의 체감 실업률이 20%에 육박하는 한국으로서는 한번쯤 귀담아들어볼 만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네덜란드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만성적인 실업에 허덕였다. 경제위기가 정점에 달했던 1981년부터 1983년까지 3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졌고 실업자도 한때 80만명까지 치솟았다. 1980년대 네덜란드의 경제성장률은 0%였다. 하지만 1983년부터 해마다 취업자가 2%씩 증가한 끝에 지난해 실업률을 5.5%까지 낮추는 데 성공했다. 이 나라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바로 1982년 11월 네덜란드의 사용자단체 VNO-NCW 회장이었던 크리스 판 빈과 최대 노조단체 FNV의 빔 콕 회장이 맺은 ‘바세나르 협약’에 열쇠가 있다. 노사 양측이 ‘임금인상 억제’와 ‘노동시간 단축 및 일자리 재분배’를 맞교환한 것이다. ‘인위적인 임금억제’ 가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사회협약을 주관해온 경제사회협의회(SER)의 얀 뷔빈크 대변인은 “임금인상이 억제되더라도 반대급부로 무엇을 보장 받느냐에 따라 근로자들의 태도는 달라진다”고 설명했다. 임금억제를 받아들인 노동자들에게 정부가 건넨 ‘선물’은 세금삭감이었다. 1982년부터 1997년까지 네덜란드 국민의 세금부담은 평균 2.8% 줄었다. 같은 시기 유럽연합(EU) 국가들의 세금부담은 오히려 2.6% 증가했다. 네덜란드 노동재단의 야니 무어란 사무국장은 “2004년에도 임금인상을 완전 동결하는 대가로 소득세를 감면했다”며 “이 같은 상호노력이 재정적자 감소와 물가상승 억제로 이어져 개인의 구매력은 오히려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네덜란드의 경우 임금억제와 노동시간 단축으로 만들어진 일자리가 시간제 근로자로 채워졌다. 이는 합의를 통해 일자리를 창출한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서도 독특한 사례다. 물론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차별은 없다. 똑같은 사회보장 혜택을 받으며 고용도 안정돼 있다. 땅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아일랜드 더블린의 그래프턴 거리(Grafton Street). 이곳은 요즘 아일랜드의 경기활황을 반영하듯 각지에서 몰려든 쇼핑객들로 북적거렸다. 한때 ‘버려진 자식’ 취급을 받았던 아일랜드가 1인당 국민소득 5만달러를 넘는 부국으로 변신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현장이었다. 아일랜드의 실업률 하락추세는 세계의 경탄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마이너스 성장이 계속되던 1987년 17.4%였던 실업률은 매년 1~2%포인트씩 줄어 2005년 4.1%까지 떨어졌다. 아일랜드 역시 경제성장의 해법은 사회구성원 간의 타협이었다. 아일랜드 노사정은 1987년 제1차 사회협약인 국가경제회복 프로그램(PNR)에 합의했다. 이로써 3년 동안 임금인상률은 2.5% 범위 내로 제한됐고 정부는 소득세율을 낮춰 국민들의 부담을 줄여줬다. 아일랜드는 3년마다 새로운 내용의 사회협약을 체결하고 있다. 노조 측도 이 같은 합의에 만족해한다. 아일랜드의 최대 노동단체 ICTU의 폴 스위니 경제고문은 “임금인상 억제정책이 경제위기 극복과 성장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며 “또 대화를 통한 합의는 노조의 힘을 강화시킬 뿐 아니라 세계화 시대에 좋은 전략으로 삼을 만 하다”고 말했다. 스웨덴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들은 올 들어 현지에서 인력을 제때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황성수 삼성전자 현지법인장은 “현재 스웨덴에서 고급인력이든 단순 노무직이든 사람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며 “인력시장에 오퍼를 내고 채용하는 데까지 9개월이 걸린다”고 귀띔했다. 수출비중이 50%를 넘는 스웨덴은 ‘일하는 복지국가’다. 일자리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완전고용→소득 안정화와 복지재원 공급→복지국가 구현의 스웨덴 모델은 붕괴될 수밖에 없다. 경제성장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 스웨덴 모델의 핵심이다. 스웨덴 역시 1990년대 초반의 경기침체에서 벗어나 경제성장과 저실업을 달성하는 데 노사 간의 대타협이 열쇠가 됐다. 스베카 루데베리 스웨덴기업연합(CSE) 이사는 “1938년 살트요바덴의 사회적 대타협 전통에 따라 투쟁과 대립이 아닌 대화와 협상을 통해 산업별로 임금ㆍ단체협약을 맺어왔다”고 말했다. 페카 일랴 안틸라 핀란드 경제연구소장은 “핀란드의 경우 최근 10년간 파업사태를 거의 겪지 않았다”면서 “이는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지 않아 생활수준이 전혀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사회 대타협이 근로자들에게 생활의 안정이라는 선물을 안겨줬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