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서경이 만난 사람] 김용근 산업기술진흥원 원장

소득 4만달러 위해선 R&D 시스템 창의적으로 바꿔야



생산성·효율성도 필요하지만 고부가가치 명품 창조가 중요

인문학과 융합 과감한 도전을


연구과제 사전기획 바람직

정부는 방향성만 잡아주고 민간이 구체내용 주도해야


"국민소득 2만달러에서 4만달러로 가기 위해서는 연구개발(R&D) 시스템을 창의적이고 도전적으로 바꿔야 합니다. 지금은 정부 과제 공고가 나가면 기업들은 벼락치기로 보고서(과제수행계획서)를 만들고 연구팀을 급조해 과제를 따가는 시스템입니다. 그렇다고 사업화에 성공하는 것도 아닙니다."

김용근(56ㆍ사진) 산업기술진흥원(KIAT) 원장은 3일 서울경제신문 본사에서 단독 인터뷰를 갖고 "정부 연구과제도 이제는 사전 기획이 중요하다"며 "정부는 방향성 위주로 잡고 민간이 세부기획에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현 시스템처럼 모든 것을 국가가 풀어내는 게 아니라 기업 스스로 주도해야 더 성과가 좋다는 의미다. 지금은 몇 억짜리 과제도 30분 만에 평가하다 보니 목표가 정해졌고 답만 열심히 푸는 입시제도와 같다는 지적이다. 입시 공부할 때 족집게 과외교사를 찾듯 고민 없이 보고서만 잘 만들어도 따낼 수 있다는 고언이다.

김 원장은 또 "전세계적으로 중요한 연구는 비밀리에 진행하는데 국가 과제를 공고함으로써 전세계에 알리고 있다"며 "패러다임을 서둘러 바꿀 필요가 있다"고 꼬집었다. 이날 김 원장은 2시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에서 우리나라 산업기술 정책과 과제에 대해 인문학적 관점에서 산업정책통다운 날카로운 시각으로 한국 산업의 향후 방향을 적시,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R&D 3.0으로 '퍼스트 무버' 돼야

김 원장은 우리 R&D 시스템에 대해 아직 모든 게 '패스트 팔로어'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평했다. 기능적으로는 최고에 올라섰지만 선진국의 단일 기술을 그대로 도입했던 R&D 1.0 시대와 기술을 따라잡는 데 치중했던 R&D 2.0 시대에 그친다는 것. 그는 창의적으로 시장을 선도하기 위해서는 "기술이 예술적 경지에 이르러 소위 '명품'이라는 고부가가치를 창조해야 국민소득 4만달러 시대를 열 수 있다"고 설파했다.

김 원장이 강조하는 R&D 3.0이란 생산성과 효율만이 아니라 '가치'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는 것. 그는 "연구소장 혼자 하는 게 아니라 기술 외에 인문학ㆍ예술 등 이종 분야와의 융합을 통해 창의적ㆍ개방적ㆍ도전적 R&D를 추구해야 한다"며 "시간이 오래 걸리고 복잡할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빠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부 R&D 과제가 성공률은 높지만 사업화는 잘 이뤄지지 못하는 것에 대해 김 원장은 "실패를 두려워하고 용인하지 않는 안전제일주의 문화가 어느 정도 작용한 것 같다"며 "성공하기 쉬운 것으로만 R&D 과제를 수행하다 보니 실제 소비자의 필요와는 관계없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기술만 개발하게 된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평가를 위해 실시간으로 영수증을 관리하는 국가에서는 기능적 성과는 나오지만 창의적인 결과물이 나오는 데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특히 김 원장은 "새로운 생각, 새로운 기술에 대한 실험으로 실패를 당연시하고 오히려 장려하는 문화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꼬집었다. 즉 통제 베이스에서 신뢰를 기반으로 한 생각 베이스로 시스템을 바꾸고 도전적 과제를 잘 골라 과정을 평가하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김 원장 취임 이후 KIAT는 기술인문 융합을 위한 방편으로 서울 대학로에 기술인문융합창작소를 설립했다. 이와 관련, 그는 "기술이 감탄에 그치지 않고 감동을 주려면 인간과 교감하고 소통하는 R&D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며 "창의융합콘서트를 열어 이공계 인재들과 인문학ㆍ예술계 분야 인재들이 만나 융합에 대한 아이디어를 공유하도록 주선했다"고 설명했다.

이와 유사하게 서울 금천구와 인천 부평에는 '생활 속 창의공작 플라자'를 열었다. 이곳은 아파트 근처에서 아이들이 직접 손으로 만지고 조립하면서 기술에 대한 감각을 익힐 수 있도록 하는 공간이다. 그는 "초ㆍ중등학생들이 대부분의 학교에 변변한 공작실이 없어 이론으로만 기술을 배우고 있는 실정"이라며 "기술이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아이들이 몸소 느낄 만한 기회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쉬웠다"고 토로했다.

◇지역산업, 미래산업 기반 토대 갖춰

KIAT는 광역경제권 선도산업을 비롯해 다양한 지역산업 육성정책을 수행하고 있다. 실제 그간 산업의 불모지로 여겨졌던 지방이 원주 의료기기 클러스터나 광주 광(光)산업 클러스터, 전북 자동차 부품 클러스터와 같이 신산업의 거점으로 성장해 미래산업기반 토대를 마련하는 효과도 속속 나타나는 상황이다. 김 원장은 "지역산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지 10년가량 됐는데 지역에서 주도적으로 지역산업을 육성하고자 하는 의지와 네트워크가 아주 강해졌다"며 "광역경제권에서 교수ㆍ기업가가 모여 클러스터를 형성하고 서로 발전 방안을 고민하며 혁신 역량이 커졌다"고 진단했다.

그는 또 "순창 장류, 한산 모시 등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지역 내 전통산업이 현대화되는 계기 또한 만들었다"며 "앞으로도 지역 내 기업ㆍ대학ㆍ연구소 등을 유기적으로 통합, 조정해 지역의 산업경쟁력을 제고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김 원장은 "시설과 장비를 갖추는 양적 하드웨어 측면을 넘어 R&D, 인력교육, 해외 마케팅 등 소프트한 정책을 강화해야 더 내실화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지역에 어떤 우수 기업이 있는지 몰라서 지원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우수한 지역 인재들이 지역 기업으로 갈 수 있게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KIAT는 지역사업 지원사업을 통해 고용연계형 R&D, 지역 인재 외 지역 내 우수 기업의 매칭 등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 매칭 패러다임 사람으로 바꿔야

관련기사



지역 이야기가 나오자 자연스레 일자리 문제로 화두가 이어졌다. 일자리 미스매치 문제는 구조적으로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중소ㆍ중견기업은 사람이 없다고 아우성이고 지역 기업의 인력난도 심각하다. 이에 대해 김 원장은 "산업구조 고도화와 인력 수급 불균형에 따라 고용 창출이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면서 "건물을 지어주고 사람을 찾는 방식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매칭 패러다임을 하드웨어에서 사람 중심으로 바꿔 정부 주도였던 외부 인프라 구축은 지역에 맡기고 인력 매칭에 보다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뜻이다.

김 원장은 산학 협력 시스템에 대해 "기업과 학교가 모두 윈윈(win-win)하려면 형식적인 협력 관계에서 벗어나 보다 긴밀하게 연결돼야 한다"면서 "기업의 현장실습 프로그램은 학점 취득용으로만 운영되기 쉬운데 사전에 교수진과 긴밀히 협의해 교육 커리큘럼을 짜고 교육기간도 유동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또 "학교 역시 산업체 요구에 맞게 학생들을 전문 직업인으로 육성시켜 직접 채용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을 이었다.

◇중견기업 육성 구심점 역할도

정부의 중소ㆍ중견기업 정책을 지원하는 것도 KIAT의 주요 역할 중 하나다. 오는 2020년까지 세계적 경쟁력을 가진 중견기업 300개를 육성하자는 목표로 정부가 추진하는 '월드 클래스(World Class) 300' 프로젝트를 KIAT가 주축이 돼 시행하고 있다. 김 원장은 "지난해 30개 기업을 선정한 데 이어 올 5월에도 37개 기업을 추가로 신규 지정했다"며 "기술력ㆍ성장잠재력 등이 우수한 기업을 선정해 인력, 자금, 경영 컨설팅 등을 총체적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KIAT는 최근 원내에 중견기업 전용 원스톱 서비스를 위해 '중견기업육성지원센터'를 만들었다. KIAT는 KOTRAㆍ생산기술연구원ㆍ산업기술평가관리원(KEIT)ㆍ중견기업연합회 등 유관기관과 협력해 중견기업육성지원센터를 꾸려가게 된다.

김 원장은 "기존 WC 300 사업을 추진하면서 쌓은 중견기업 지원에 대한 경험과 전문성을 인정 받은 셈"이라며 "앞으로 중견기업육성지원센터에서는 WC 300 프로젝트 추진을 포함해 중견기업 확인제도, 중견기업들의 애로사항 파악, 관련 실태조사, 통계분석, 장기 재직자 지원 프로그램의 일환인 희망엔지니어적금사업 등을 수행하면서 중견기업 맞춤형 정책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향후 할 일을 알렸다.

이어 그는 "향후 센터 조직과 인력을 확대해 핀란드의 고성장 잠재기업 2,000여개에 대해 기업당 1명의 담당 컨설턴트가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는 '그로스 펌 서비스(Growth Firm Service)' 프로그램 수준의 전담기구로 개편해나가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김용근 원장은

새로운 산업정책 산파역… '천리안'으로 불려

김용근 산업기술진흥원(KIAT) 원장은 '천리안'으로 불린다. 항상 앞을 보고 새로운 정책을 많이 꺼낸다 해서 붙은 별명이다. 아이디어맨인 그는 23년간 공무원 생활을 하며 신규 업무를 두루 개척했다. 각종 산업정책의 '산파' 역을 도맡은 셈.

김 원장은 상공부 사무관 시절 당시 산업기술에 대한 인식조차 없던 실정에서 업무를 키워 지난 1986년 공업기반기술사업을 시작했다. 현재 산업기술정책국의 산파 역할을 한 셈이다.

우루과이라운드(UR) 총괄사무관을 하면서는 세계 통상과 UR에 관한 책도 집필했다. 그는 "당시 UR를 반대한다고 우루과이대사관 앞에서 시위할 정도로 개방하면 죽는다고 했다"며 "가장 합리적으로 개방할 수 있는 스토리는 다자협상이라는 주제로 쓴 책 수천 권이 홍보자료로 뿌려졌다"고 밝혔다.

통상산업부 과장이었던 1995년에는 산업정책의 틀로 외국인 투자유치 업무를 시작하며 최초로 선진국을 대상으로 유치활동을 펼쳤다. 김 원장은 "당시 투자유치를 금융의 시각에서 봤는데 제가 자금ㆍ기술ㆍ인력 등을 함께 봐야 하는 산업정책이라 설득하고 다녔더니 어떻게 한국에 외국 기업이 와서 돈 벌게 하느냐며 매국노라는 얘기까지 들었다"고 말했다.

이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인베스트코리아(외국인투자지원센터)를 세운 것도 김 원장의 활동이 밑거름이 됐다.

참여정부 초대 지역국장을 맡아 국가균형발전 업무를 추진한 역할도 김 원장이 맡았다. 그는 "처음에 팀도 없이 저만 태스크포스(TF) 형태로 발령 받아 지금의 토대를 닦았다"면서 "항상 초기에는 자료를 구하기도 어렵고 내부 협조도 잘 안 돼 어려움이 컸다"고 회상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국제통화기금(IMF)이 높은 금리를 요구하자 김 원장이 고금리 요구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기고를 뉴욕타임스에 낸 것은 유명한 일화다. 미국 허드슨연구소에 파견 나갔던 그는 무작정 미국 언론사에 연락해 '외환위기와 한국' 관련 기고를 쓰겠다고 요청했고 뉴욕타임스가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김 원장은 "미국의 주요 언론이 하나같이 우리나라 경제정책의 실패만을 비난하고 억울한 점은 다루지 않기에 한국은 일어난다는 취지로 써 보냈다"고 설명했다.

KIAT 원장 취임 후에 그는 '융합 전도사'라는 새로운 별칭이 생겼다. '기술과 예술' '기술과 감성'의 융합을 통해 기술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는 철학을 늘 강조하고 다니기 때문이다.

조용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5월 연임에 성공한 김 원장은 "지난 3년간은 KIAT의 초대 원장을 맡아 조직의 안정과 기관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정신없이 지내온 시간"이라며 "앞으로는 안정된 조직의 체력을 한층 강화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고 강조했다.

◇약력

▦1956년 전남 순천 ▦1974년 전남 순천고 졸업 ▦1980년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1980년 행정고시 23회 ▦1985년 상공부 사무관 ▦2000년 산업자원부 산업정책과장 ▦2003년 산자부 지역산업균형발전기획관 ▦2007년 산자부 산업정책관 ▦2007년 산자부 무역투자정책본부장(차관보) ▦2008년 한국산업기술재단 이사장 ▦2009년 한국산업기술진흥원 원장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