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문고의 지난 10년간 베스트셀러 동향을 보면 90년대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를 간접적이나마 읽어낼 수 있다.세상이 수상한 시절에 사람들은 피폐해진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가벼운 읽을거리를 찾는다. 90년대 베스트셀러 1위는 96년 1월에 출간되었던 잭 캔필드의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이레 펴냄)이다. 이 책은 경기퇴조에서 IMF로 가는 길목에 인기를 더하면서 97년 초·중반을 완전히 휩쓰는 초대형 베스트셀러 자리에 올랐다.
3권으로 출간된 이 책은 원래 동일한 원작이 94년말 푸른숲에서 「내 영혼의 닭고기수프」라는 제목의 한권짜리로 출간되어 별 인기를 끌지 못하다가 도서출판 이레에서 같은 역자(류시화)에 새롭게 번역을 의뢰해 내용을 보완하고 3권으로 묶은 것. 불안심리에 휩싸여 있는 현대인들의 마음에 따뜻한 감동을 주는 도서로 인식시키는 출판사의 마케팅이 절묘하게 성공, 대박을 터트리게 된 것.
90년대 최대 히트소설로 꼽히는 김정현의 「아버지」(문이당 펴냄)도 마찬가지. 이 소설이 히트했던 96년말에서 97년 중반까지는 경기퇴조로 인해 명예퇴직, 감원 등으로 사회 분위기가 크게 위축되었던 시기. 「아버지」는 시한부 인생을 사는 40대 후반 중년 가장의 애틋한 가족사랑을 담고 있는데, 사실 명예퇴직이나 감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나 출판사에서 우울한 시대의 초상으로 「아버지」란 이미지를 부각시키면서 시대의 흐름을 대변하는 소설로 인식되어 대성공을 거두게 된 것이다.
1, 2위를 차지한 위의 두 책은 모두 200만부 안팎의 판매실적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3위를 차지한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창작과 비평사 펴냄)는 우리것찾기 붐이 일어나던 당시의 시대상을 잘 반영해준다. 이 책은 특히 인문서적도 대형 베스트셀러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4위를 차지한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김영사 펴냄)과 6위에 오른 한호림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디자인하우스 펴냄)도 시대의 흐름을 잘 보여주는 책. 90년대 후반에 들어갈수록 강세를 보이는 실용서의 인기를 잘 입증해 보이는 책들이다. 이 책들은 단기간에 인기를 모은 히트작이 아니라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은 것도 특징으로 꼽힌다.
이밖에 93년 대학입시제도 변화에 따른 초대형 베스트셀러 「반갑다 논리야」, 좀머씨라는 독특한 캐릭터의 인물을 내세운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화제작 「좀머씨 이야기」, 쉽고 재미있는 역사서의 대표격인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영원한 스테디셀러 법정스님의「무소유」가 7~10위를 차지했다.
결론적으로 말해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읽어내는 출판기획과 마케팅전략이 성공의 지름길이 된 것으로 평가된다.
분야별로 살펴보면 문학분야가 상위 50위 가운데 36종으로 72%를 차지해 절대적인 강세를 보였다. 비소설은 모두 13종으로 소설 다음으로 출판시장을 지배하는 주력분야임이 증명됐다.
시 부문이 「시의 시대」라 불릴만큼 독서시장을 주도했던 80년대에 비해 급격히 퇴조한 것도 이색적이다.
90년대말부터 등장한 인터넷 사이버 서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최근 급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사이버 서점이 자리잡으려면 무분별한 가격경쟁을 지양햐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90년대 독서시장의 흐름을 통해 2000년대를 내다보면 본다면 실용서의 강세와 문학서, 학습참고서의 퇴조가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90년대 중반부터 이미 드러난 현상이지만 실용서는 계속 영역을 확대하면서 2000년대 출판시장을 주도할 것으로 보인다. 컴퓨터 분야는 물론이고 글로벌화에 따른 외국어 수요가 지속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경제성장에 따른 유아용 도서나 여성들의 사회활동을 도와주는 여성 실용서도 인기를 모을 것같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이후 계속 퇴조하고 있는 소설분야는 주독자층인 청소년·대학생들의 독서시장 이탈이 기속화할 것으로 보여 더욱 쇠락의 길을 걸을 것으로 전망되고, 대학입시제도 변화에 따라 학습참고서 시장도 붕괴의 위험이 높아 보인다. 반면에 학습서 시장을 대신할 수 있는 청소년 교양도서의 개발이 시급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용웅기자YYONG@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