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대. 일본의 국내 업체가 1927년 한해 동안 생산한 승용차다. 관동대지진(1923년)에서 유사시에는 자동차가 철도보다 효율적이라 판단하고 자동차산업을 육성한 지 5년이 지났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포드의 현지법인이 판매한 8,677대의 3%에도 못 미치는 상황에서 33세 청년 도요다 기이치로(豊田喜一郞)는 ‘미제보다 좋은 차를 만들겠다’고 마음먹었다. 계획을 실행에 옮긴 것은 1930년. 씨줄과 날줄이 얽히면 기계가 멈추는 G형 자동방직기의 특허권을 영국에 판 돈 10만파운드를 밑천으로 부친의 방직기 제작소 구석에 연구실을 차리고 엔진과 강판까지 직접 개발, 1935년부터 승용차와 트럭을 생산했다. 기이치로는 이때부터 공장 곳곳에 ‘Just-in-Time!’이라는 구호를 붙였다. 부품을 적시에 공급하자는 뜻이다. 아이치현 고로모촌(도요타시)에 1937년 공장을 세울 때도 그는 창고를 짓지 않았다. 생산성 극대화를 위한 그의 노력은 오늘날 최고의 경영성공 모델로 손꼽히는 도요타 생산방식(TPS)으로 이어지고 있다. 도요타자동차와 간반생산 방식을 창시했음에도 그는 ‘비운의 창업자’로 기억된다. 노사분규와 경영위기 끝에 퇴진했기 때문이다. 1950년 극심한 불경기로 인원감축이 불가피해지자 그는 직원해고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며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퇴임한 지 불과 보름 후 한국전쟁이 터져 미군이 발주한 트럭 생산으로 도요타가 회생의 발판을 다지는 동안 그는 바깥에서 연구와 개발에 매진했다. 경영일선 복귀가 결정된 직후인 1952년 3월27일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사망(58세)했지만 미국을 넘겠다는 그의 꿈은 도요타가 GM을 제치고 세계 1위로 등극한 2007년 현실이 됐다. 청년의 육신은 세월 속에 사라졌어도 꿈은 80년 만에 이뤄진 것이다.